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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 Oct 12. 2024

부재로부터 존재가 되는 길

스무살 1월 1일, 나는 세상을 뜨기로 했다. 35킬로의 몸무게로.

- 시작


 나는 내 몸을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표현할 마음이 없다. 뼈는 점점 직선을 향해 가지만, 여전히 내가 추구하는 건 곡선이므로. 허리와 골반 사이의 꺾임 정도가 내 행복을 좌우했다. 아니다. 굶는 동안 내가 행복했는지 잘 모르겠다. 굶는 건 어느새 습관이 되어 있었다. 스무 살 1월 1일. 그때부터였다.


 재수없는 소리지만 나는 뚱뚱했던 적이 없다. 뚱뚱은 고사하고, 정상 체중에 도달한 적도 없었다. 타고나길 마른 체형이었다. 그건 나의 특기이자, 특성이자, 주무기였다. 어른들은 내 몸을 부러워했다. 얇은 팔과 다리를 보며, 자신의 가장 예뻤던 시절을 회상했다. 어른들은 한 번씩 제 양팔에 나를 가뒀다. 그리곤 허리 인치를 가늠하거나, 허리를 쓸어보거나, 그도 아니라면 끈질긴 시선으로 내 아래 위를 훑었다.

 나는 어린 시절 무용을 했었다. 무용반에 들어가고 그 관심은 더 짙어졌다. 선생님과 언니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내 몸을 칭찬하거나, 부위별로 나눠 내 몸을 품평했다. 그 중 내가 가장 많이 들었던 얘기는 '쟤는 하얗고 말랐다' 였다. 개중엔 강조하는 '개' 자를 붙여 개말랐다, 개하얗다, 표현하는 언니들도 있었다. 하얗고 마른 건, 내가 가진 유일한 특성이었다. 그리고 그런 줄 알았다. 이따금 들려오는 인형 같단 말에 자부심을 느끼기 바로 전 증세였다. 하얗고 마른 것에 집착하는 건, 사춘기 후부터였다. 남들과 다른 나만의 개성을 찾아야 했다. 나는 그게 내 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남들보다 느리게 먹고, 느리게 쪘다. 같은 양을 먹어도 내 앞배는 평평했다. 그런데 너무 안일했던 탓일까. 고등학교 2학년 여름, 처음으로 살 쪘단 얘기를 들었다. 내게 그 얘기를 한 친구는 절대 악의가 없었다. 단짝 친구기도 하고, 내가 살이 쪘다 하면 두 손 들고 환영해줄 친구기 때문이다. 내 기억에 남는 건 말보다 행동이었다. 친구는 내 팔뚝을 제 손으로 감싸 한 번 주물렀다. 나는 그게 너무 수치스러웠다. 예전이라면 모두가 손을 펼쳐 내 팔뚝을 감쌌을 거다. 그런데 주무르는 행위, 혹은 살을 찌르는 행위. 그건 나를 제외한 사람들만 겪어봤던 경험이었다. 수치심은 생각보다 오래 갔다. 나는 밥을 많이 먹는 날이면 항상 그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급식도 괜히 조신히 먹었다. 조금 먹으면 이래서 말랐구나, 많이 먹으면 너 생각보다 많이 먹네. 들려오는 말들에 어찌할 줄 몰랐다. 그렇다면 차라리 조금 먹고 칭찬 받는 쪽을 택하는 게 나았다. 그리고 대망의 스무살 1월 1일. 나는 알바를 하다가 친구들에 불려갔다. 친구들은 술상을 먹고 엎고 또 해치웠다. 나는 중간 자리에 앉아서 술잔만 홀짝였다. 목 넘김이 드러나도록 삼키는 일은 절대 없었다. 혀 끝에 술 맛을 대보는 게 다였다. 안주도 스무번씩 소분해서 먹었다. 보다 못한 친구가 내 얼굴에 술을 튀겼다. 그리곤 억지로 입에 움식물을 넣었다. 내 입엔 떡볶이 한 번, 황도 한 번, 소주 한 잔. 이렇게 일정한 절차를 거쳐 음식물이 들어갔다. 맞은편 친구들은 먹여주는 꼴을 보고, 꼭 이유식 먹는 아이 같다며 나를 비유했다. 그 말엔 또 기분이 좋아졌다. 하여간 칭찬이라면 나는 맥을 못 추었다.

 집에 와서 몸무게를 재봤다. 앞자리는 괜찮았다. 4 정도도 충분히 마른 몸이었다. 그런데 일의 자리 숫자가 가히 충격적이었다. 체중계는 43을 가리켰다. 43은 내 인생 최대 몸무게였다. 그리고 내 키에 43이면, 드디어 정상 범주에 들어가는 몸이기도 했다. 이대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친구의 살 쪘단 얘기가 떠오른 한편, 내 정체성을 잃는 기분이었다. 살을 빼야겠다고 다짐했다. 처음 목표는 40이었다. 그런데 욕심이 났다. 아예 앞자리 숫자를 바꿔보고 싶었다. 욕심은 자꾸만 커져, 내 여자로서의 정체성 역시 앗아갔다. 시작이었다. 먹고 토하고 변비약을 찾게 되는 것이.





 - 혼란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내 집착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실제로 남사친 중 한 명은 내 거식을 자해라 표현하며, 매일같이 음식 기프티콘을 보내온다. 살 좀 쪄라, 넌 좀 쪄도 돼, 쪄도 예뻐. 남친 행세를 하며 말이다.


 그런데 이상했다. 섭식장애를 앓게 된 계기가 불분명했다. 나는 단지 예뻐 보이고 싶단 욕구 하나가 내 거식증을 초래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에세이를 계속 쓰면서,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면서, 겉돌고 있단 느낌을 받았다. 중심 원인은 남겨둔 채 껍데기만 핥고 있는 기분이었다. 사실대로 고백하자면, 에세이를 쓰면서도 나는 이유를 몰랐다. 선생님의 질문 하나가 나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외모지상주의가 문제라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다 거식 혹은 폭식증을 앓아요? 그 말에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모르는 문제의 답을 찾는 건 굉장히 어려웠다. 답답해 죽을 지경.


 지금부턴 내 거식증이 멍청한 집착이 아니라는 근거를 대볼 차례다. 일종의 자기 변명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이건 변명이 아니라 사실이니깐.


 우선 잠깐 내 상태에 대해 열거를 하고 가야한다. 내 상태는 갈수록 극에 치닫고 있었다. 피부는 다 뒤집혀 목 주변이 온통 두드러기로 잠식됐다. 나는 긴 손톱으로 목을 벅벅 긁었다. 목 위에 얼음팩을 올려놔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간지러움은 밤새 지속됐다. 오히려 증식됐다. 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졌다. 잠을 포기하는 날도 많아졌다.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샜다. 그리곤 정면을 바로 보고 누운 채, 꼬르륵 대는 배를 외면하려 애썼다. 아주 허기가 진 날은 밤을 새도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머릿속에 식욕과 수면욕의 대결 구도를 만들었다. 그리곤 둘 중 무엇이 이기는지 매일 밤 씨름했다. 결과는 식욕 승. 나는 잠에 들지 못했다. 자세를 바꿀 수도 없었다. 옆으로 누우면 갈비뼈가 자꾸 배를 찔렀다. 나는 할 수 없이 부동 자세로 양을 샜다. 그러다 그냥 고기 먹는 상상에 빠져 버렸다. 자주 무기력하고 예민한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몸을 일으켜 거실에 혼자 앉았다. 그때쯤 내게 방석은 필수품이었다. 엉덩이 뼈가 바닥에 닿아 아팠다. 오래 앉아 있지 못했다. 나는 자주 골반을 들썩였다. 그래야 고통이 양쪽 볼기로 분배됐다. 먹고 목구멍에 손을 찔러 넣는다거나, 중간에 폭식 시기가 겹친다는 건 얘기하기 싫다. 그건 이미 너무 흔하고, 떠올리기도 싫은 기억이다.

 이렇듯, 친구 말을 빌리자면 자해 같은 행위가, 인간의 욕구를 필연적으로 참는 행위가. 과연 예쁘고 싶단 욕심만으로 가능한 일일까. 일시적인 다이어트면 몰라도, 나는 거식증으로 치닫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나름 내린 결론은 나의 가정 문제다. 내 거식증은 나의 가정환경과 사회적 분위기가 합쳐져 형성됐다.





- 과정


 우리 엄마는 늘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다. 특히 내 외모에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다. 엄마는 식탁에 마주 보고 앉는 저녁 식사 시간이면 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곤 손에 쥔 젓가락으로 내 눈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엄마가 내뱉는 말은 하나였다. 눈 크기를 키워라. 쌍꺼풀 수술을 해라. 눈물샘이 보일 때까지 앞을 확 틔워버려라. 나는 그 말을 중학교 2학년, 3학년, 고등학교 3년, 성인이 된 지금까지도 듣고 있다. 엄마의 불만은 눈에 그치지 않았다. 엄마는 내 몸 구석구석을 핥듯이 살폈다. 먼저 상체. 넌 살이 없어서 가슴은 작은데 모양은 예쁘구나. 나도 몰랐던 정보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하체. 볼 게 없는 줄 알았더만 엉덩이는 예쁘네. 근데 다리는 굵네. 넌 종아리가 왜 그렇게 굵니? 나는 그 말을 초등학교 때부터 들어왔다. 다리가 굵다는 말. 그 말은 내 무의식 깊은 곳에 박혀, 여름을 무서워하게 만들었다. 나는 폭염이 찌는 듯한 더위에도 긴 바지를 고집했다. 종아리를 가려야 했기 때문이다. 회색 바지를 입은 날이면 바지 구석구석에 진한 물이 들었다. 그래도 다리를 보이는 바에야 땀에 젖는 게 나았다. 그러다 고등학교 1학년, 학교 축제가 있는 날이었다. 늘 편한 체육복 차림을 고수하던 내게, 남자친구가 돌 하나를 던졌다. 제발, 축제 때는 교복 치마 입어주면 안 돼? 나는 꽤 오래 고민했다. 내 치마는 통을 줄이지 않아 모양도 펑퍼짐한 A라인 인데다가, 무엇보다 다리를 보여야 했다. 쉴새없이 조르는 남친의 표정을 보자니 마음이 약해졌다. 그래서 당날 결국 치마를 입고 갔다. 그런데 걱정과 달리 반응은 좋았다. 오래 봉인된 내 다리는 다른 누구보다 하얬다. 처음 내 살색을 본 남자친구는 못 볼 걸 본 것처럼 한동안 나를 쳐다보지 못했다. 어린 시절, 무용할 때나 듣던 몸 칭찬을 몇 년만에 다시 듣게 되었다. 다리가 예쁘다, 몸이 하얗다, 잊고 있던 칭찬들이 다시 상기됐다. 나는 그 길로 용기를 되찾았다. 그리곤 당장 수선집에 달려가 치마를 줄였다. 치마는 욕심내서 두 단, 한 통을 줄여 거의 H 모양에 가까웠다. 걸을 때마다 두 가랑이가 서로 접쳤다. 하지만 그건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걸을 때고, 나는 두 다리가 서로 접치지 않았다. 나란히 전진했다.

 그러다보니 내 몸에 대한 칭찬은, 내 애정 결핍을 채워줄 요소가 됐다. 엄마와의 얘기는 쓸 게 너무 많지만 일단은 남겨둔다. 이 글은 거식증을 정리하기 위한 글이니 말이다. 아무튼, 내게 자부심을 느끼게 해줄 요소는 외모 뿐이었다. 마른 몸 뿐이었다. 그것만이 칭찬과 애정을 끌여들었다. 그래서 나는 내 몸만이 내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힘겹게 다이어트를 하는 엄마를 보며 우월감을 느꼈다.

 

 거식증을 겪으며 별 희한한 감정을 다 느꼈다. 나조차도 이해 되지 않는 감정들이었다. 그때 내 세상에 나보다 마른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몸을 훑고 다녔다. 그러다 나보다 마른 사람의 다리를 보면 시무룩해졌다. 마른 사람 중에서 내가 제일 마르고 싶었다. 시기심, 질투심, 그러나 동경. 살을 빼고 난 뒤엔 우월감으로 치환되는 악감정들. 그때의 나는 좀 많이 미웠다. 지금도 해결된 문제는 아니니, 여전히 내가 곱게 보이진 않는다.

 그리고 조금 결이 다른 얘기지만, 엄마를 아프게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엄마가 죄책감을 느끼길 바랐다. 생리가 몇 달째 끊겼을 때, 부러 엉망이 된 생리대를 화장실 변기에 펼쳐뒀다. 피 찌꺼기와 냉이 마구 섞인 분비물이었다. 엄마는 놀라서 뛰쳐왔다. 아픈 몸에는 반응이 즉각적이었다. 그래서 내가 아프단 걸 엄마가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 의문


 그런데 엄마는 왜 이러는 걸까. 왜 외모지상주의에 갇혀 있는 걸까. 엄마는 내게서 제 결핍을 보기도 하고, 대신해서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엄마의 그림자이면서 트로피인 셈이다. 엄마 친구들은 나를 보며 너무 말랐다고 동경의 눈빛을 보낸다. 그럼 엄마는 제 몸도 아니면서 으쓱해한다. 그러게, 얘는 이렇게 말랐는데도 다이어트를 한다니깐? 하며 모두의 동경을 자아낸다. 그런가하면, 나는 엄마의 결핍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엄마는 쌍꺼풀 수술을 했다. 그래서 나를 보면 자꾸 미흡한 부분들이 비치는 가보다. 엄마의 행동을 이해하려면, 대를 타고 올라가 할머니를 탐구해봐야 한다. 그런데 할머니는 지금 내게 너무 멀고, 편찮으시다. 그래서 나는 이걸 다른 주제로 돌려보기로 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말하기도 조심스럽지만, 나는 내 문제가 사회적인 문제와도 연관이 있다 생각한다. 정확한 명칭은 페미니즘.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지만, 그건 내 세상에 관한 얘기고. 엄마와 할머니가 살던 세대는 바뀌기 전의 세대다. 그런데 그런 엄마가 나를 교육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 전의 문화가 잔존하지 않을까. 나는 그 잔존하는 문화를 야금야금 먹고 있다. 배는 고픈데 악한 것만 자연스레 스며든다. 그래서 내 거식증의 원인은 애정결핍과 순전한 나의 욕심, 잘못된 외모상, 사회적 문제들이 복합된 거라고 생각한다. 내 몸을 뜯어보면 악한 건 모두 가지고 있다. 악한 걸 비우려 차라리 나를 지우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 무게로 존재했다. 그런데 내 목표가 요절은 아니므로. 더군다나 어디까지 살을 뺄지 정확한 목표 지점을 정해두지도 않았으므로. 이제는 비어 있던 존재를 채워가려 한다. 그게 내겐 부재로부터 존재가 되는 길이다.


 생각날 때마다 글을 덧붙여야겠다.





 다음은 그냥 한때 나의 자존감을 채워줬던 말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깐 내가 저 이미지에 나를 끼워 맞춘 것 같다.


지금은 두리안이 되었다




학교쌤들한테 그렇고 인형 같단 말을 자주 들어봤다. 근데 좋은 말인지 아닌지 이제야 혼란스럽다.




학교 떤땡님 ... ㅠㅠ




친구가 남긴 말




 근데 다시 봐도 기분 좋은 말들이긴 하다. (가끔씩 또 읽어봐야징 ㅎ) 그렇지만! 저 분위기에서 하루 빨리 탈출해야 성장이 있을 것 같다. 언제까지고 연약한 열여덟살로 남아 있을 순 없으니 말이다. 존재가 되기 위한 노력은 지금도, 미래에도, 부단히 해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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