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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 혼자 이혼한다 Sep 14. 2023

나 혼자 이혼한다

이혼하고 싶지만 이혼하지 못하는 인생 이야기


"너 혼자 잘 살아라."


문을 쾅 닫고 집을 나왔다

자정이 다 될 무렵, 무작정 손에 지갑과 핸드폰만 덩그러니 들고 그렇게 집을 나간다. 


"너가 나한테 해준 게 뭔데?"


딱 이 한마디가 뇌리에 꽂힌다.


결혼 9년 차.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결혼 생활이다. 지난 9년 동안 죽어라 직장에서 일만 했다. 물론 좋은 시절도 있었다. 억대 연봉도 찍어보고, 억대 성과급도 받아보고, 나름 강남 아파트까지는 아니지만 서울 역세권에 20평짜리 아파트도 자가로 마련했다.


"넌 자랑할게 돈 밖에 없지?"


맞는 말이다. 돈 밖에 할 말이 없다. 물론 나름 퇴근하면 열심히 육아도 하고, 주중이면 와이프는 집에 둔 채 아이들만 데리고 교외로 나가 나들이도 갔다. 와이프 생일과 결혼기념일을 챙기고, 일 년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해외여행도 갔다. 그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냐, 기본 중에 기본이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그. 딱히 내세울 거 없이 기본정도만 한 건가?


지난 9년간의 시간과 노력을 부정하자니, 나 자신이 너무 비참해진다. 간신히 우울증도 공황장애도 잠잠해졌는데... 다시 한번 귀에서 이명이 들린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 와이프의 폭언,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으려나 보다.


그 순간 "살아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문을 박차고 나섰다.


경험해 본 사람을 알겠지만, 9년 차 결혼한 유부남이 자정이 거의 다 된 시간이 갈 곳이란 별로 없다. 젋을 때처럼 싸구려 모텔을 가기도 이상하게 보이고, 그렇다니 호텔은 혼자 가기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집 앞에서 담배 한 대를 피고 나니 갈 곳이 더욱 막막해진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곳이 얼마 전에 와이프가 오픈한 작은 가게였다. 여전히 와이프와 관련된 공간 밖에 떠오르지  않으니, 이혼 준비가 덜 됐구나 싶다.


좁은 줄만 알았던 20평짜리 가게가 막상 바닥에 누워보니 휑하니 크게 느껴진다. 여름이지만 밤이 되고, 반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거 없이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으니 한기가 돈다. 그래, 오늘 하루만 참자. 이제 내일부터 차근차근 이혼 준비를 하면 되니, 처음부터 서두를 필요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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