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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Mar 02. 2024

구찌 수용소 이후

내게 청년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50이 훌쩍 넘은 나도 아직은 요즘 트렌드대로면 청년일 수 있겠다.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군이지만

지병이 있는 요주의 환자이지만

아직은 세상에서 일이 남았던가보다. 

나는 청년이 주는 면역력 덕분에

코로나가 주는 공포로 인한 증세나 후유증은 볼 수 없었다.

호텔 격리 동안의 1주일과 구찌 야전병원에서의 2주,

총 3주간의 격리를 벗어나 드디어 퇴소가 가능했다.


3일마다 계속된 검사에서 삼 주 이상, 세 번 연속으로 음성이 나와야 가능한 허가증.

나의 긴 격리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8월 1일 음성 판정이 나왔고 그 다음날  퇴소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 당시 베트남은 외부 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다.

슈퍼 가는 것도 , 밖을 산책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고

차량도 허가된 차들만  다닐 수 있었다.

텅 빈 도로와 문닫힌 가게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ZALO 앱을 통해 내 업무와 통역을 맡아 해주던 총무가 차량을  수소문하고

퇴소시간에 맞춰 차를 보내주었다.

자신도 호텔에서 격리 중이었지만...... 

허용되지 않는 오프라인 업무에도 불구,

일을 멈출수는 없기에  손을 놓고 있는 일은 없었다.

각 가정에서, 격리소에서, 혹은  자신의 집 안에서  사람들은 업무를 이어가고 있었다.

대절 차량으로 회사로 간다.


오후 5시 50분경, 대절차량이 도착하자 나는  혼자 차에 올랐다.

비닐 가림막으로 온통 도배가 된 차량을 타고

환영해 주는 사람이 없었듯, 환송해 주는 사람도 없는

지독한 고독의 절차대로 나는 회사로 이동했다.


3주간의 격리 후에도 2주는 집에서 격리해야 하는 게 원칙이어서

2주 동안 다시 회사 사무실에서 생활을 이어가기로 했다.


임금님 수라상 못지 않은 한식,쌓인 서류 더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무실 냄새

앉은 자리가 닳아버린 해진 내 의자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았고 귀하게 여겨지지 않는 게 없었다

소소하며 사소한 하나하나가 주는 귀한 느낌.


나는 돌아왔다.




회사 급식실에서 준비해 준 식사. 한식 식사, 너무 그리웠다.

`재수가 없다`

`왜 이리되는 일이 없나`

`무슨 이런 세상이 다 있나`


혼자서 수백 번도 더 되뇌었던 말들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내가 백신을 맞고서 얼마 되지 않아 코로나에 걸린 것이며

그나마 환경이 나아 보이는 구찌에서

그나마 나쁘지 않은 병증을 보이는 그들과 함께

2주간의 짧지만 긴 격리를 지낸 것은,

바깥에 있다 한들  생업으로 고민하고 괴로워했을 내겐 

작은 휴식 같은 시간일 수도 있었다.


구찌로 오기 전까지

나는 매일, 매 순간이 고통스럽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내게 딸린 많은 책임과 의무들이 산재해 있지만

방법이 없어 동동거리기만 했을 뿐

난 거의 손을 놓고 있었으니......


달라진 건 없었다.

처리해야 할 일은 산더미였고

줄어든 오더양도 그대로고, 

직원들 감염자 수도 늘어나긴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언제 끝날 지 모를 긴 경기에서

숨 고르기를 하고 기다리라는

신의 계시 같은 건 아니었을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변함없이 같은 결과를 요구했고

늦어지거나 불량에 대한 클레임은 가차 없었다.


체중이 살짝 줄어들긴 했지만 내 건강은 문제가 없었다.

흔한 후유증세도 특이한게 없었고 다소 붕 뜬 듯한 기분만 현실로 잡아당기는 일만 남아 있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나처럼만 코로나가 진정되어 줬으면...

하지만 그 상황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공장도 문을 닫아야 했다.

정부 결정이었다.

하노이에서 군인이 내려와 호찌민 전체를 봉쇄하고 보급품을 각 가정에 나눠주는 등

도시의 거리는 개미조차 숨죽이며 기어 다닐 정도로 변해버렸다.




8월 21일

회사에 남아있는 게 무의미해져

집으로 돌아왔다.

48일 만의 귀가였다.

아내가 없는 이곳에서 나는 먹고살기 위해 식료품 확보전쟁을 다시 준비해야 했다.


회사에선 직원들이 알아서  끼니를 준비해 줬지만   아파트에선 직접 재료를 구하러 다녀야 했다.

일부 슈퍼마켓과 식료품 점,

아파트 단지 야채 가게에서  계란이 들어왔다는 정보가 단톡에 뜨면

달려가 줄 서서 재료를 구입했다.

22일  아파트  단지 마트가 마지막으로 문을 연 날, 물건 구매를 위해 긴 줄이 생기고 나도 거기에 서있었다.

나만 겪는 일이 아니었기에

한국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들이지만 다 받아들였다.

아무것도 아니다.

불편했지만 언젠가 옛말하며 이 순간을 떠올릴 그날을 기다리며...

구해온 식재료로 그날 하루는 풍족해진다.

나는 오늘도 계란 몇 알, 가래떡 한 팩, 야채 몇 개를 구입해 들어와

식탁 위에 전리품처럼 늘어놓는다.

그득한 식재료를 보니 1주일은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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