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은 절대 쉬워질 수 없다
며칠 전, 한국에서 아버지가 유럽으로 출장을 오셨습니다.
아버지는 이탈리아 해변의 작은 도시로 시작해 여러 군데 곳곳을 다니셨고 마지막으로는 독일의 카를스루에와 슈투트가르트에 갈 일정이 있으셨습니다.
제가 사는 스트라스부르에서 슈투트가르트까지 버스로 두 시간 정도 걸립니다. 그래서 주말에 아버지를 만나러 다녀왔습니다.
우선 저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저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애틋한 마음도 들고 어느 누구나 그렇듯 성인이 되고 나서는 아버지가 완벽히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주로 어렸을 때 추억이 많은데요. 저는 초등학교 5학년쯤 때까지는 아버지가 꼭 와서 재워줬습니다.
그때 속마음 얘기도 하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과 가족들에게 서운한 일 등 모두 다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곤 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쯤은 꼭 아버지의 마음을 시험하듯 누가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냐고 묻고 그게 저가 아니라는 식으로 대답하시면 삐지기도 했습니다.
주말이면 가끔 우리 둘이서만 데이트하자고 나가서 동네 놀이터를 돌던 기억도 납니다. 중학생 때 한번은 제가 북경에서 살 때, 제가 읽고싶어하는 심리학 관련 책들을 한 상자 사서 택배로 보내주셨는데 그 안에 아버지가 쓴 3장짜리 편지도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늘 저에게 다정하십니다.
제가 20대 초반 때 저희 가족은 많이 어려워졌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이 잘 되지 않던 탓에 조금씩 조금씩 대화가 줄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티 내려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아버지가 제일 소중하다고 가끔 말하긴 했지만 어렸을 때와 성인이 된 지금은 집안의 분위기 탓인지 약간의 거리가 생긴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슈투트가르트에 가는 길에 아버지와 이야기를 많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정말 제 속마음을 어린아이처럼 다시 꺼내보고 싶은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를 토요일 아침 11시쯤에 슈투트가르트 공항 쪽에 위치한 한 호텔에서 만났습니다.
피곤하셨는지 얼굴은 좀 부으셨었는데 저를 만나자마자 말이 많아지던 아버지였습니다.
시내로 나가는 지하철 안에서도 종일 쉬지 않고 말하셔서 장난으로 “아빠 참 말 많은 사람이다”라고 하자 아버지는 그런 저에게 마치 제가 아직 초등학생인 마냥 ”우리 딸이니까 “ 라며 웃으면서 말하셨고 그 말이 좀 뭉클했습니다.
아버지는 평소에 신문을 달고 사십니다. 눈을 뜨자마자 그리고 거의 매 시간마다 좌파 우파를 불문하고 여러 가지 신문을 읽으십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나라에 아무 일도 안 났어”라고 장난으로 엄마와 저는 놀리곤 합니다. 아빠의 잡다한 지식이 많아서인지 아빠가 꺼내는 이야기는 늘 재밌다고 할 순 없지만 호기심을 자극하긴 합니다. 십중팔구는 제가 궁금했던 주제들 이야기를 하시기 때문에 늘 이야기를 마치면 똑똑해지는 느낌도 듭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학구열이 높으시고 세상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슈투트가르트 시내를 돌며 아버지 손을 꼭 잡고 돌아다니니 그 시간이 너무 좋았습니다. 아버지는 손에 땀이 차는 것을 느끼셨을 텐데 딸의 손을 놓기가 정말 싫으셨나 봅니다.
저도 맞추어서 하루 종일 잡아드렸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뿌듯했던 것은 제가 프랑스에서 번 돈으로 멋진 이탈리아 식당에서 식사를 대접할 수 있었다는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그 레스토랑에서 보낸 시간을 저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왠지 꿈속에 들어온 것 같단 느낌을 태어나서 처음 받아봤습니다.
시내로 나와서 아버지와 카페에 갔습니다. 사업얘기만 종일 하시길래 왠지 서운해진 저는 저에게 궁금한 것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공부가 끝나면 뭐 할 생각이냐고 물으셨습니다. 프랑스에서 정규직으로 취직할 거냐 하셨습니다.
왠지 모르게 저는 용기가 생겨서 그러고 싶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지금 만나는 사람과 결혼도 하고 싶다고 넌지시 말씀드려 보았습니다.
“하지 말라해도 할 텐데 뭐”라고 말하시며 허락도 반대도 아닌듯한 말씀을 하셔서 살짝 마음이 아팠지만 아버지의 입장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도 꺼내놓고 나니 뭔가 숙제를 마친 듯 마음이 편해졌고 이 시간을 더욱 즐기고 싶어 졌습니다.
아버지가 너무 피곤해하셔서 저녁에는 공항에서 파는 컵라면을 사들고 숙소에 가서 먹었습니다.
솔직하게 꺼내놓는 이야기인데, 저는 그날 밤 많이 울었습니다. 당장 다음날이면 또다시 헤어져야 한다는 게 너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아픈데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걸까,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제발 뭐라도 좋으니 해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울다 잠이 들었고 다음날 아침에 8시쯤 아버지의 방으로 가서 10시 정도까지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요즘에 사업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간식과 음료에 관심이 많고, 한국의 어딘가에 납품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합니다.
아버지는 30년째 같은 사업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서 공통점을 발견했고 제가 궁금했던 부분들을 하나하나 속 시원하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얼마 전 아버지는 다른 분과 동업도 시작하셨는데, 회사가 커진다면 저에게 유럽부를 맡겨도 되겠다며 우스갯소리를 하셨습니다.
그렇게 궁금증도 해소하고 나니 오랜만에 건설적인 대화를 한 것 같아 너무 뿌듯하기도 하고 아버지랑 지금 성인이 되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둘째 날은 아버지 컨디션을 고려해 일부러 시티투어버스를 타고 슈투트가르트 시내를 돌고 중간에는 벤츠박물관에도 갔습니다.
거기서도 멋지게 꾸며놓은 레스토랑에서 태국식 카레를 먹었는데 솔직히 저는 별로였지만 아버지는 너무 맛있다 하셔서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박물관에서 왠지 이대로 헤어지기 싫다는 생각이 강했고, 몇 시간밖에 못 자고 출근해도 괜찮으니 오늘 하루만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버스 시간을 다음날 새벽 5시로 바꾸고 일부러 버스정류장이 슈투트가르트보다 훨씬 멀 것 같아 오늘 아버지 방에서 신세 좀 진다고 했습니다.
그 덕에 저희는 오후 3시 반쯤 날씨 때문에 숙소로 돌아와 8시가 넘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금전적 자유를 얻을지, 그래서 한국에 더 자주 갈 수 있을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후련했고 아버지가 내 편이구나 라는 생각에 마음도 든든해졌습니다.
미친 척하고 해 보라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뭐라도 좋으니 뭔가 아이템이 걸릴 때까지 도전해 보라고, 나중에 돼서 시작하려면 시작하기가 더 힘들어질 수 있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아버지와 많은 대화를 나누어서일까, 저는 다시 힘을 얻었습니다.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 뒤척이는 소리가 평소에는 걸리적거려서 한국에서는 방문도 꼭 닫고 자는 편이었는데, 이 날은 왠지 그 소리가 듣기 좋게 느껴졌습니다.
다음 날 저는 또다시 바보처럼 울지 않고 오히려 생각회로를 돌리는 방법을 터득해야 앞으로 더 큰 일도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긍정적인 부분만 바라보려 노력할 수 있었습니다. 슬퍼만 하기엔 우리 모두의 인생이 너무나 짧단 생각이 듭니다. 슬퍼하는 순간 일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나갑니다. 어찌 됐든 가족과의 안녕은 평생 쉬워질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강해져야만 합니다. 생각전환을 빠르게 할 줄 알아야 저의 목표도, 저의 행복도 둘 다 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더 발전하려고, 더 나아지려고 한 선택이고 조만간 곧 거리가 아픔이 되지 않을 거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부지런한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려 모든 알람을 삭제했습니다.
목표를 뚜렷이 바라보고 긍정적인 사고와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할 시기라는 걸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던 주말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