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에 가기 싫어!
2006년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였다. 그날 조달청으로 첫 출근을 했다. 초콜릿 대신 공무원증을 받았다. 나쁘지 않은 교환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합격 통보를 받은 날, 눈물을 흘렸다. 감동의 눈물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말하면 안도의 눈물이었다. 서른이 다 되어서 겨우 자리를 잡았다는. 이제 좀 사람 구실을 하고 내 밥벌이를 할 수 있겠다는, 민망한 종류의 눈물. 그러나 시대가 그랬다. IMF 이후 공무원과 교사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국가직 9급 공무원, 당시 경쟁률 약 147:1. 147명 중 살아남은 1명이 바로 나였다. 그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 지금은 그냥 그렇다.
발령받은 첫날, 선배 주무관님이 나를 반기며 말씀하셨다.
"어서 와. 고생문이 훤허구 먼."
국가공무원법 제1조도 아니고, 헌법 제7조도 아닌, 이 한마디가 내 공직생활 20년의 진짜 제1조가 될 줄은 그때 몰랐다. 나는 그날 속으로 결심했다.
'열심히 하자. 나는 뻔한 공무원은 되지 않을 거야.'
그런데 입사 첫해, 선배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이제부터 발령은 전국으로 날 거야. 다음 네 근무지는 김천이 될 확률이 높아."
김천? 나는 잠시 지도를 머릿속에 펼쳐봤다. 경상북도. 서울에서 고속버스로 세 시간.
9급 공무원 공채는 권역별로 모집했다. 나는 당당하게 서울·인천·경기 권역 시험에 합격했다.
그래서 절대 지방에서 근무할 일은 없다고 믿었다. 내가 왜 김천으로 발령을 가야 하는가?
"나는 수도권으로 응시했는대요. 그래서 김천은 안 갈 거예요"
"아직 신삥이라 세상 물정을 모르는구먼. 야, 그런 구분 없어야."
공무원이 공무원한테 속은 기분이 이런 것이었다. 고작 첫 발령지에만 적용되는 지역 구분 모집. 점수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나는 선택지를 따져봤다. 김천행을 받아들인다. 혹은 버틴다. 방법이 하나 있었다. 서울시 공무원과 1:1 인사교류. 서울시 구청 직원과 1:1로 자리를 맞바꾸는 것이다. 국가직인 나, 지방직인 그쪽. 서로 원하는 자리로. 공식 제도였다. 불법도 아니었다. 다만 쉽지 않은 방법이었다.
조건이 맞는 상대를 직접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찾아 나섰다. 집요하게. 지금 생각하면 꽤 처절한 구직 활동이었다. 이미 공무원인데, 공무원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또 다른 공무원을 수소문하는 일.
하지만 나는 서울·인천·경기를 포기할 수 없었다. 내 뿌리가 여기 있었다. 가족이 여기 있었다. 내 삶이 여기 있었다. 김천에 가면 그걸 다 두고 가야 했다. 심지어, 그때 나 미혼이었다. 서울 남자랑 결혼하고 싶었다.
당시 행안부 공채 담당자에게 거친 말을 내뱉고 싶었다. 아마도 그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겠지.
"유감입니다, 규정이 바뀌었습니다,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이 말은 내가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되었다. 훗날.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나는 남들과 다른 공무원이 되긴 했다. 이 글을 쓴 나는 우리구청 직원 천명을 대표하는 지부장이 되었다. 사실 번아웃이 온 지는 꽤 오래되었다. 41세부터 혈압약을 먹고 있다. 그러나 다른 동료나 선배들은 하얀 백발을 선물로 받았다. 번아웃과 스트레스라는 선물.
20년을 버텨온 내 이야기와 주변 공무원 관찰기를 쓰려고 한다.
바로, 우리들이 한 개씩 갖고 있는 철밥통 이야기를. 친절과 빡침의 경계에서 분열되는 우리의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