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물가고 있는 중입니다만
달리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달리기 시작하면서 괜스레 마음이 설렌다.
들뜨고 두근거리고 기분이 마냥 좋다.
누구나 무언가를 새로 시작할 무렵엔 그렇지 아니한가.
나도 그러하다.
*
지난 9월 15일,
캘린더 속 11월 1일에 빨간 별표를 하며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
처조카의 결혼식에 쭈글쭈글 바람 빠진 호빵맨처럼 등장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처가 식구들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그래서 달리기로 했다.
달리기의 결과물은 당연히 건강하고 날렵한 나의 몸매.
그러나 슬림한 몸매는 운동만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식이요법이 병행되어야 한다.
적게 먹고 많이 달려야 한다.
내 몸에 들어간 칼로리보다 내가 밖으로 내보낸 칼로리가 많아야 한다.
13킬로를 빼기 위해서는 그것도 압도적으로.
*
하루 24시간 중, 나는 언제 달리면 좋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새벽에 일어나는 건 쉬운데 새벽에 일어나서 달리는 건 어렵다.
달리기는 원래 어려운 일인데 새벽에 일어나서 달리는 거는 정말 어렵다.
9월이면 새벽 6시에도 어둡다.
일찍 일어나도 사방이 어두우니 달리기가 만만하지 않다.
위험하기도 하다.
*
이것저것 재다 보니 아무것도 안 되겠다 싶어 아무튼 달렸다.
새벽 달리기를 시작한 것이다.
9월 15일 달리기 시작했고, 11월 1일 처조카 결혼식까지 약 45일 내에 13킬로를 감량하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새벽 4시에 일어나 5킬로미터를 달리는데 1시간이 걸렸다.
1킬로미터당 10분이 넘는 기록으로 속보보다 느리다.
달리기 동호회의 웬만한 러너들은 10킬로미터를 50분대에 끊는다고 한다.
나보다 두 배 이상 빠르다.
언젠가 내 글 어딘가에 써놓았다.
한강 둘레길을 달리던 어느 아침이었다.
아빠와 함께 둘레길 산책을 나온 꼬마 녀석이 내 곁을 지나가며 내게 손가락질을 해댔다.
"아빠! 저건 뛰는 게 아니야. 걸어가는 나보다 느려. 헤헤."
녀석은 그렇게 나를 비웃고 모욕했다.
'너 정말 통찰력이 대단한 아이구나.'
하지만 녀석아, 그거 아니?
이게 바로 슬로우 조깅이란 거란 말이다. 헤헤
*
드디어 처조카의 결혼식이 도래했다.
그동안 나는 부지런히 달렸다.
일주일에 최소 6일을 달렸고, 한번 달리면 적어도 5킬로 이상을 달렸고,
시간이 넉넉한 주말에는 거리를 더 늘려 달렸다.
6킬로도 달리고 7킬로도 달리고, 드디어 한 번에 10킬로까지 달렸다.
내 달리기의 특징은 슬로우 조깅이고 한번 달리면 완주할 때까지 절대 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제 당당하게 날렵한 몸매로 결혼식에 등장했을까.
13킬로 감량 목표 기준, 7킬로 감량 성공.
절반의 성공이었지만, 나름 나쁘지 않은 결과이다.
두 달도 안 되는 기간에 13킬로를 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내게는 그런 경험이 꽤 있다.
운동을 미친 듯이 하고 식사량을 줄이면 다행히도 살은 쭉쭉 빠졌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목표의 절반밖에 빠지지 않았을까?
몇 가지 실패 원인이 있다.
저녁 5시 이후 금식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무너지는 날이면 저녁에 꼭 과식을 했다.
다이어트 기간에는 반드시 금주를 해야 하는데 이 또한 지키지 못했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미친놈처럼 술을 마신 적이 많았다.
절반의 성공이라지만 실패는 실패다.
*
아무튼 나는 달릴 것이다.
한물가고 있더라도 끝물은 아니니까.
앞으로 10년 안에 마라톤 42.195km를 완주하겠다는 새로운 목표도 세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