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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무튼 달리기(2)

한물가고 있는 중입니다만

by 판도


며칠 전 장례식장엘 다녀왔다.


집에서 나갈 준비를 하며 셔츠 목 부분의 단추를 채우려는데 도무지 이게 되질 않는다.


한참을 끙끙거리며 혼자 씨름을 하다 결국 아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간신히 셔츠를 입고 이번에는 넥타이를 매려는데 이게 또 매는 법이 도무지 기억나지를 않는다.


어찌어찌해서 간신히 혼자 끝내긴 했지만 분명한 것 하나, 뇌라는 녀석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두 손에 남아 있던 기억으로 넥타이가 매진 것일 뿐.


역시 나는 한물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게 어찌 나뿐이랴.


최근 재활의학과 전문의 정세희의 '길 위의 뇌'라는 책을 몇 번이나 읽었다.


(달리기를 해보겠다는 사람에게는 동기 부여가 되는 정말 좋은 책이다.)


책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20세가 지나면 당신은 이미 늙기 시작했다."


그러니 10대라면 모를까, 세상 사람들 모두 똑같이 한물가고 있는 것이다.


청소년을 빼고는 누구도 젊음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는.


*


지난 금요일 한낮, 한강 둘레길을 달렸다.


두 시 기온 20도.


시원한 바람이 내 몸에 닿는다.


햇살은 따스하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달리기다.


이런 조건에서 달릴 수 있다니!


두 발로 땅을 박차고 달릴 수 있는 자는 행복한 사람이다.


고로 나는 행복한 사람.


요양원에 가본 적이 있는가?


그들 중 제대로 걸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누워 있거나 휠체어를 타거나 보행기에 의지하여 몸을 움직일 뿐이다.


내 의지로 내가 원하는 곳을 향하여 이동할 수 없는 삶은 행복할 수 없다.


달리기는커녕 걷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아프면 나만 아픈 것이 아니다.


주위의 가까운 이들 모두가 고생을 하고 희생을 해야 한다.


가족을 포함한 타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


우아하게 한물갈 수는 없겠지만, 엉망으로 황혼을 향해 기어가기는 정말 싫다.


그래서 어제도 달렸고 오늘도 달릴 것이다.


*


지난 11월 1일.


몸뚱이 이곳저곳에 붙어 있던 지방 덩어리 7킬로를 불태우고 처조카의 결혼식장에 등장하였다고 해서 내가 처가 일가친척의 놀라운 환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옷차림 탓에 '백년손님'의 지위를 스스로 깎아내렸으면 모를까.


내막은 이렇다.


열심히 지방을 불태웠건만 옷장에 걸려 있는 양복 정장은 모조리 맞지 않았다.


억지로 양쪽 팔을 집어넣었더니 겨드랑이에서 투두둑 소리가 났고, 앞단추는 하나도 채워지지 않았다.


바지는 더했다.


두 다리는 간신이 구겨 넣었지만 허리춤은 단추를 채우기에 너무 먼 당신이었다.


'아직 멀었구나.'


나는 자각했고 실망했고 우울했다.


역시 13킬로 감량에 실패한 것이 문제였다.


나는 왜 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니 두 다리는 죄가 없다.


정말 최선을 다해 달렸다.


심장도 죄가 없다.


터질 듯 헐떡거리면서도 끝까지 달려 주었다.


문제는 뇌와 입과 배였다.


얄미운 뇌는 언제나처럼 배고파했고 술을 마시라 부추겼으니까.


사소한 일로 아내에게 성질을 부린 것도 문제였다.


생일 선물로 양복 정장을 받기로 했건만 욱하는 내 못된 성질이 그 좋은 기회를 발로 뻥 차 버린 거다.


그래서 꾀를 낸 것이 파릇파릇한 콤비 정장 상의에 더 파릇파릇한 라운드 티에 청바지까지.


(콤비 상의는 간신히 맞았고, 청바지는 새로 샀다.)


하객 중에 나처럼 날라리 복장으로 나타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례식장도 아니고, 결혼식장의 하객들의 옷차림은 왜 하나같이 칙칙할까.


*


지금 시각 오전 5시 30분.


오늘은 일요일이니 러닝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일과에 쫓겨 캄캄한 새벽에 달린 날도 많았지만 아무래도 어둠 속의 러닝은 달갑지 않다.


해가 뜨는 시각에 맞추어 바람을 가르리라.


참, 장례식장에 갈 때 기어코 아내에게 생일 선물로 정장 한 벌을 받아내었다.


아내여, 고맙다.


밤 11시가 다 되어 장례식장에서 돌아오니 거실에 있던 큰 딸이 나를 보고 놀란다.


"아빠 꼭 킹스맨 같아요."


정말 기분이 좋았다.


젠틀하고 간지 나는 킹스맨이라니!


곰탱이를 킹스맨으로 변신시킨 달리기의 놀라운 효능을 몸소 체험한 거다.


그래서 오늘도 아무튼 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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