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를 한 이듬해 난생처음 해외로 나갔다. 내 나이 스물넷, 해외여행 자율화의 물결로 세상의 폭이 한껏 좁혀지던 1991년 한여름의 일이었다. 일본 도쿄에서의 3개월 어학연수. 일본어를 배우려 떠난 먼 길이었건만 배운 것은 정작 따로 있었고 3개월은 3년보다 길고 험난했다. 한 달에 1킬로씩 살이 빠졌다(갈비뼈가 보일 정도로 원래 말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대보다 힘이 들었다. 어학연수가 아니라 '체험 삶의 현장'이었다. 3개월을 살며 두 번의 이사를 했고 3명의 룸메를 만났다.
도쿄 다카다노바바의 어학원을 알선해 준 여행사 놈들은 죄다 사기꾼이었다. 기숙사가 딸린 어학원이라더니 새빨간 거짓말이었기에 나는 일본에 도착한 첫날부터 노숙자로 전락할 뻔했다. 운이 좋아(그때는 운이 좋은 줄로만 알았고 고난의 시작인 줄 몰랐다) 동급생의 맨션에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다.
첫 번째 룸메는 그해 봄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보다 몇 달 먼저 건너온 애송이었다. 조용한 주택가 맨션에 짐을 풀자마자 녀석은 동네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나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처음 간 곳이 오락실. 녀석의 수준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군대에서 익힌 사격 솜씨를 뽐내며 한 보따리의 인형을 녀석의 가슴에 안겨 주었다. (앞으로 잘 봐 달라는 뜻으로) 집주인인 룸메를 위한 싸구려 뇌물이었다. 두 번째로 그가 이끈 곳은 맥도널드. 다시 한번 녀석의 눈높이를 가늠할 수밖에. 자리에 앉아 힐끗 옆 테이블을 보니 중학생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여자 아이들이 한 손으로는 담배를 피우며 다른 한 손으로는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어학연수가 아니라 컬처 쇼크 탐방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충격적이었던 일들을 더 이야기해 본다. 편의점에 가면 만화 주간지를 살 수 있었는데 그 노골적인 외설스러움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음란마귀가 지면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스토리도 황당하고 그림도 대담했다. 티브이 오락 프로는 더했다. 여자와 남자 출연자가 탁구 시합을 했다. 여기까지는 아주 평범했는데, 문제는 점수를 잃으면 옷을 하나씩 벗어야 한다는 것. 결국 먼저 벌거숭이가 된 남자는 어디선가 가져온 대야로 중요 부위를 가렸고 다시 점수를 잃자 여자 출연자는 바리깡으로 남자의 머리통에 고속도로를 내버리는 것이었다. 모두가 낄낄거리며 웃었지만, 그 가학스러움에 나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아무튼 일본은 그런 나라였고 우물을 박차고 나와 바다까지 건너온 개구리는 엄청난 충격에 눈만 끔벅거리고 있었다.
첫 번째 룸메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자.
알고 보니 녀석은 대학도 가지 않고(가지 못하고) 한국에서 말썽을 일삼다가 돈 많은 엄마에 의해 일본으로 쫓겨난 부유한 개차반이었다. 툭하면 녀석은 여자아이를 데려와 밤새 사랑을 나누었다. 내 알 바 아니었건만 문제는 맨션이 원룸이었다는 거고 나는 결국 신경쇠약에 걸리고 말았다. 또한 개차반의 외삼촌이라는 재일교포가 후견인 행세를 하며 갑자기 나타나 내게 월세를 요구했다. 더부살이를 하는 입장에서 당연하다 싶어 월세를 건네었건만, 이 사실을 안 개차반은 그냥 살지 왜 돈을 냈냐고 화를 냈다(내가 낸 월세는 개차반의 손에 이르지 못하고 결국 양아치 외삼촌이 꿀꺽했으니까). 한편 양아치는 돈을 갈취한 것이 미안했던지 내게 알바 자리를 구해줬다.
신주쿠에서도 한국 술집으로는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제법 큰 호스티스 클럽(구라부라고 부르는)이었는데 주 고객이 야쿠자였다. 난 그곳에서 첫날은 홀 서빙을 했지만 일본어를 못한다는 이유로(내 전공이 일본어다) 다음날부터는 주방 설거지로 내려앉았다(천만다행이었다). 양아치는 그곳에서 민요를 부르는 가수였다. 노래는 꽤 수준급이었지만, 나는 양아치의 노래보다 색소포니스트의 연주가 더 좋았다. 라이브로 듣는 색소폰 선율에 홀려 그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색소폰을 배워 일본에 눌러앉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나는 매일 밤 꿈속에서 클럽 무대에 서 구슬프게 색소폰을 불었다.
클럽에서는 매주 월요일마다 영업 전에 호스티스들을 앉혀 놓고 미팅을 했는데 분위기가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마담은(오마마라고 불렸다) 20명이 넘는 호스티스들을 향해 '정신 차려 이년들아'라고 쌍욕을 하고 '돈 벌러 남의 나라까지 와서 헛짓거리 하지 마라'라고 호통을 치곤 했는데 그때마다 아가씨들은 눈물을 흘렸다(마담을 포함해 모두 한국인이었다). 일본어 공부는 글렀구나 하는 생각에 나도 눈물을 흘렸다.
두 번째, 세 번째 룸메도 만만치 않았다. 덕분에 나는 한국에 있었으면 절대로 만날 수 없는 이상한 사람들과 이상한 장면들과 조우하며 세상을 배웠다. 그들의 이야기는 따로 시간을 내어 마무리 짓겠다.
여행은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값진 경험을 선사한다.
학교도 책도 가르쳐 주지 않는 인생을 가르쳐 준다.
떠나기 전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모른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 온몸으로 부딪혀 볼 일이다.
돌아오면 한 뼘쯤 키가 자라 있을 것이다.
가족여행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시코쿠 가족여행 프롤로그를 올린 후, 지구 반대편 어디론가 훌쩍 떠나 한 달 살이, 아니 몇 년이라도 살다 올 것처럼 부산을 떨며 여행 준비를 했다. 그것만으로 행복했다. 식당 일이 힘들 때에도, 반대로 손님이 없어 지겹도록 무료할 때에도 미친 듯이 여행 계획에 매달렸다.
따지고 보면 여행 계획이라는 것이 별 거 없다. 애초의 목적이었던 힐링이나 재충전 따위는 이미 개에게 줘버렸고, 오직 삼시 세끼 무엇을 먹을 것이냐에 집중했다.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가 아니다. 살기 위해 끼니를 때우듯 살았던 야윈 청년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없다. 지금 내 몸과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노욕 중의 하나인) 식욕이란 괴물은 모든 욕망을 압도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인간다워져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억울하게도, 원초적 짐승에 가까워지고 있다. 본능에 의지하고 사는 모습 - 통탄할 일이다.
여행 계획을 짜며 내가 얼마나 일본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새삼 깨달았다. 물론 내 입맛의 중심에는 여전히 한식이 자리하고 있지만, 일상을 조금이라도 벗어날라치면 맛있는 일본 음식에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가고 만다. 중국 음식도 서양 음식도 동남아 음식도 뒷전으로 밀려난다는 얘기다.
나는 기억한다.
전시회 관련 업무로 마쿠하리 멧세로 출장을 가면 쿠폰 속 다양한 메뉴 중에서도 오직 에비 프라이 정식만을 고집했던 것을.
비와코라는 바다 같이 큰 호수로 유명한 시가 현에 갔을 때다.
평소 덜 구워진 고기는 절대로 먹지 않던 나는 주방장이 구워주는 철판구이 와규는 핏물이 시뻘겋게 남아 있음에도 덥석덥석 주저 없이 해치웠다. 도대체 무엇이 사람을 변하게 만들었을까?
코트 자락에 손을 집어넣고 한참을 줄을 서 먹은 겨울 삿포로 어디쯤의 미소 라멘도 기억난다.
가족과 함께 부산에서 배를 타고 도착한 후쿠오카. 을씨년스럽던 낯선 풍경 속, 눈에 보이는 포장마차에 뛰어들어 꼬치와 오뎅을 먹었던 기억, 그게 1월 1일 새해 첫날의 일이었다.
나는 여행 예찬론자가 아니다.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지만, 그저 가끔 집을 나설 뿐이다.
그래서 이번 가족여행은 특별하다. 온천욕을 한 후 유카타를 걸치고 느긋하게 거리를 거닐 것이다. 골목 안 빛바랜 노렌을 들추고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미식에 홀려 잠시 정신을 잃을 수도 있다. 내가 태어난 산천과 다를 바 없는 풍경에도 까닭 없이 탄식을 내뱉을지도 모른다.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겁게 수다를 떨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또 어떤 컬처 쇼크와 조우할까? 아내와 딸과 아들과 함께 그 또한 유쾌하게 받아들여 함께 즐길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