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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런 날 Nov 23. 2023

뻔한 질문

오래된 여행일기


오스트리아, 빈에서

  혼자 유럽여행을 할 때의 일이다. 세 달 동안 꽤 많은 한국인 여행자를 만났다.

“안녕하세요. 여행 중이신가 봐요?”

“네, 안녕하세요. 유럽여행 중이세요?”

“네, 여행 얼마나 하세요?”

“세 달 정도요. “

“와! 세 달이나요? 저는 한 달 밖에 안 하는데, 정말 부럽네요. 혼자 여행하시는 거예요?”

“네. 그쪽도 혼자 여행하시는 거죠?”

“네, 맞아요. 어디 어디 다녀오셨어요?”

“프랑크푸르트로 들어와서 슈투트가르트, 뮌헨, 퓌센, 프라하, 빈 있다가 이탈리아 넘어왔어요. 이탈리아는 가고 싶은 도시가 많아서 한 달 정도 있을 예정이에요. “

“세 달이면 총 몇 개국 가시는 거예요? 유럽 거의 다 돌겠는데요?”

“전 되게 조금 가요. 7개국만 갈 예정이에요.”

“정말요? 되게 여유롭게 다니시는구나. 특이하네요. 저는 일정을 너무 빡빡하게 짜서 좀 힘드네요. 교통이며 숙박 이런 것들을 미리 예약해 놔서 일정을 바꿀 수가 없거든요. 저도 다음엔 느긋하게 다녀보고 싶어요.”

“여행 기간이 길지 않으면 아무래도 바쁘게 되죠. 보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많으니까요. 전 이곳에선 일주일 정도 있을까 해요. 바쁘게 돌아다니는 걸 안 좋아해서요. 하루 종일 숙소에만 있는 날도 있어요. 침대에 누워서 책 읽고 영화 보고 그래요. “

“신기하네요. 그런데 굳이 많은 도시를 안 가는 거면 짧게 여행하고 돌아가서 쉬는 게 낫지 않나요? 시간과 돈이 아까울 것 같은데……“

“여행도 하고 싶고, 여유롭게 쉬기도 하고 싶어서요. 꼭 뭘 해야만 여행은 아니니까요. 그리고 여기가 아니면 마음이 못 쉬는 거 같아서요. 쉬는 여행이랄까요?”

”아, 조금 이해가 가네요. 저도 돌아가서 다시 일할 생각에 벌써 골치가 아프네요. 그런데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

“저는 스물두 살이에요.”

“그럼 휴학하고 왔겠네요?”

“네, 일 년 휴학하고 아르바이트해서 왔어요. 제 첫 해외여행이에요. “

“와, 진짜 대단하다. 22살에 여자 혼자서 유럽여행이라니! 난 그 나이 때 뭘 했는지… 너무 멋있어요. 부럽기도 하고.”

  그때마다 나눈 대화는 반년이 지나도 기억할 만큼 항상 똑같았다. 서로의 여행기간을 공유하고 장기여행이란 대답에 놀라고, 여행루트를 물어보고 몇 도시 없는 간단한 계획에 의아해하고, 나이를 물어보고 본인의 젊은 날을 후회하고, 한국 음식이 그리운지, 다녀온 도시 중 어디가 가장 좋은지, 여행 경비는 얼마나 들고 왔는지, 이름이 뭔지, 한국에선 어디에서 무얼 하며 사는지 등에 대한 똑같은 질문. 그리고 똑같은 대답. 세 달 동안 변함없는 질문과 반응. 뻔하고 지루해도 어쩌겠는가. 낯선 곳에서 마주친 익숙함은 반갑고, 생판 처음 본 사람과 나눌 대화라곤 이런 것뿐이고, 전혀 모르는 사람과 공감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이뿐인걸.

  그러다 그를 만났다. 첫 질문은,

“혹시 마이닝거 호스텔에 머물지 않으세요?”

  같은 숙소를 쓰는 남자가 오페라하우스에서 말을 걸어왔다. 오페라 관람이 끝나고 함께 숙소에 가자고. 같이 숙소에 도착한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처음 보는 사람과 하는 대화라기엔 지극히 개인적이고 은밀한. 좋아하는 음악과 플레이리스트, 일기를 쓰는 이유, 여행 중 읽고 있던 책, 조금 후회되는 일,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따위 말이다.
  우리는 신나서 고요한 호스텔 로비의 모서리를 우리들의 질문과 대답으로 가득 채웠다. 내 조금은 별난 취향을 닮아있던 그의 대답들이 재미있었다. 오랜만에 여행일지가 아닌 일기를 쓰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다음날 각자의 일정을 위해 잘 시간이 되었다.

 그가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난 신승호예요.”

  뻔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난 왜 그 질문에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건지. 그 후로 시도 때도 없이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겨울이 다 갈 때까지.



여러분도 긴 여운을 남기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나요?


Cafe SACHER, Wien, Aust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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