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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작가 May 23. 2024

경로 이탈

팜플로나 말고 빌라바





9월 21일 메모 중


2023년 9월 21일 오후 수비리 숙소 안


숙소에서 샤워를 마치고 짐을 풀자마자 내 이층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자고 싶어서 잤다기보다 억지로 휴식을 취해야 해서 자체 씨에스타를 해야 했다.


뒤이어 들어온 미국팀과 유럽 순례자들이 내가 먼저 자고 있으니 조심조심 방에서 짐을 풀었다.

남한테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상태였다.


오늘 드디어 왼쪽 새끼발가락에 첫 물집이 잡혔다.

아주 온몸이 지금의 상황에 파업에 돌입했다.


당장 멈춰!!!!


나는 물집이 생겼고, 식중독 증세를 보이지만 길을 걷는 것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속이 계속 울렁 거린다면 적어도

하루는 여기 수비리에서 쉬어야겠다 생각하며

숙소 매니저에게 미리 언지를 해둔 상태였다.


20킬로를 걸으며 먹었던 모든 영양소를 비운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평상시 생각도 없는 난데없이

“수프”가 떠올랐다.


큰 도시도 아니고, 작은 시골마을에 유일하게 있는 슈퍼마켓에는 영어는 아예 안 통하는 촌동네인지라

내가 결국 찾은 것은 인스턴트 밥을 사다가 물을 댑혀서 둥굴레차를 우린 후 밥을 말아먹어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둥굴레차 외에 밥알 한 개도 목구멍 뒤로 넘어갈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좀 힘 좀 내자!

뭘 먹어야 움직이지!

이런 식이면 내일도 쉬어야 한다고….


나는 몸이 기운을 하루빨리 차리길 바라고 있었다.




마을의 구조는 간단했다.

스포츠 센터를 중심으로 두고

숙소들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축축하게 젖은 오후

비가 내리다 말다 하는 끄물끄물한 날씨까지 덧붙여

온몸이 두드려 맞은 기분이 들었다.


약국은 한참을 위로 올라가야 겨우 찾을 수 있었고,

병원은 휴일이라 문이 닫혀 있어서

스페인 약국에 처음 들어가 상담을 시작했다.


선생님 뭔가 잘못 먹은 것 같아요.

길을 걷는 내내 토를 했어요.

설사는 안 했어요. 

하지만 아무것도 먹을 수 없어서

이온음료만 계속 마셨어요.

속이 이제는 쓰리진 않아요.


약사님에게 나의 증상을 말하니 혹시 향수병이 아닌지 의심을 했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절~~~~ 데!


그리고 열감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상비약을 더 사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물집이 잡힌 왼쪽 새끼발가락과 오른쪽 두 번째 발톱이 불탄 듯이 아려왔다.

이 와중에 물집까지 잡혀 발이 아프니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얼마나 그때 힘들었으면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와중에도 그때의 고통이 느껴지는 것 같이 힘이 들 지경이다.


약국에서 구매한 영수증



타이레놀, 보타겔(멘소래담 같은 통증 이완크림), 꼼피드와 비슷한 유사품 물집 전용 반창고, 소화제를 구매했다.


나는 고통의 강을 건너 속을 모두 비워 내고 나니 머리가 명료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모든 것이 고요했다.

오롯이 모든 신경이 나에게 집중되는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바깥 탐방을 더 하고 싶어도 몸이 힘드니 더 걸을 힘이 없었고, 음식점에는 다 빵이나 고기를 팔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먹을 것들이 없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1층 응접실에 6시 저녁을 예약해 둔 순례자들이 줄 지어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불편한 이층침대로 돌아가기 싫어서 응접실 소파에 푹 쌓여서 앉아 사람들을 구경을 했다.


마침 이층 계단에서 크레덴셜 여권을 함께 기다렸던 호주 가족들이 식사를 하기 위해 내려와 대기 중이었다. 나를 보고는 반갑게 인사하며 함께 소파에서 대화를 나눴다.


간단하게 얘기를 나눴는데, 나는 식중독에 걸려 아무것도 못 먹고 약국에 다녀왔다 얘길 했더니

얼굴이 많이 안 좋다며 걱정을 많이 했다.


나는 기억을 거슬러 호주에서 지냈던 이야기를 했다.

이 호주 커플의 여자분은 호주에서 교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중학교 때 호주 지역 우드 포드 포크 페스티벌에 참가했던 이야기를 꺼내니 호주 지역 축제를 알고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던 나의 기억력도 신기할 정도로 어제 일처럼 명료하게 이야길 잘하고 있었다. 그럼 축제에 나가 노래까지 단체로 불렀는걸…


그분들의 아이들이 피레네를 뛰어 내려가는 걸 봤다고 하니, 십 대는 역시 다르다며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게다가 땀 한 방울 안 흘리면서 뒷동산 놀듯이 피레네를 뛰어다니다니 대단하다 생각했다.


나에게 그래도 뭐라도 좀 먹어야 하지 않느냐 물었기 때문에 나는 햇반을 사 와서 둥굴레차에 밥을 말아먹을 거라고 말했다. 오차츠게 처럼 말이다.


그리고 내 옆에 앉은 순례자분은 여기 숙소에 내 옆 이층침대를 쓰는 미군 순례자 존 아저씨였는데,

우리는 잠깐 만난 사이였지만 나는 호주 부부와 미국 군인 존아저씨에게 보살핌을 받았다.


심지어 일층에 지팡이통에 뒀던 지팡이를 누군가 가져가려고 했다면서, 내 것인 것을 알고 본인들이 이 지팡이를 지켰다고 까지 했다!


세상에... 이 지팡이 남다르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부터 이어진 낯선 이들의 여유와 선행에 내 마음이 한결 따뜻해졌다.


걷기 전에 그렇게 아프고 다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대비를 했는데, 막상 일이 벌어지고 나니

나는 이제 힘을 빼고 고난이 지나가길 기다릴 뿐이었다.




높이 안내도
아침 길에서 과일 따먹기



9월 22일 아침 날씨 맑다가 흐리다가 비 오다가

가는 경로: 수비리>>> 팜플로나? 혹은 그전 도시? 아직 미정

거리: 16.9km


론세스바예스에서 못 잔 잠을 나는 어제 수비리에 도착하고 내리 신나게 잤다.

약기운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잘 잤던 것 같다.

한결 가벼운 몸이었다.


아침 식사가 포함된 숙소 인지라 아침 7시에 내려가 오렌지 주스와 간단하게 속이 부대끼지 않는

음식들을 아주 조심스럽게 먹고 방으로 돌아왔다.


다들 바쁘게 팜플로나로 가기 위해 아침 일찍서부터 움직였다.나는 출발할 마음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룰루 랄라 여유를 부리며 숙소에서 미국 군인 존 아저씨네 그룹과 프랑스 부녀를 다 보내고 텅 빈 방 안에 혼자 오늘 걸을 것인지 말지를 결정했다.


이날이 의미 있었던 이유는 이제부터가 나의 진짜 길을 걷는 것 같았다.

카미노앱의 하루 루트도 숙소의 예약도 이제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나”였다.


그래서 지금 걸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나에게 물었다.


일단 짐을 싸서 체크아웃 시간에서 체크인 전까지는 나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짐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왔다. 그래서 그때 받은 방 카드키를 프런트에 반납을 안 하고 다시 돌아올 예정이었는데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버려서 순례길 내내 이 카드키를 버리지 못하고 들고 다니며  집에 있는 이 카드키를 볼 때마다 수비리에서의 기억을 회상하곤 한다.(반환해야 하는데 죄송한 마음 한가득입니다.)


 밖으로 나와 버스 정류장을 찾다가 햇살이 나오는 걸 보고 나는 마음을 돌려 카미노 화살표를 찾아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거의 9시가 다되어 길을 걷기 시작했다.

목표는 20km 도시의 어딘가도 아니었다.

오늘은 걸을 수 있을 때까지만 걷자였다.



포레스트 검프가 장애를 딛고 달리기 시작한 순간


고! 포레스트 고!

더 이상 생각하지 말고 포레스트처럼 상황에 맞춰 앞으로 걸어 나가자!


제니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가사가 잊히지 않았다.

얼마나 더 걸어야 내가 나로서 인정받을 수 있나요?


그 노래는 포레스트의 감정을 표현하는 가사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걷는 내내 그 대사가 나에게 이입되어 나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는 대화 같단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힘들어야 너 자신을 너로서 봐줄 건지에 대한 질문으로서 말이다.


모두가 수비리 다음으로 걷는 팜플로나가 답이라 생각하고 걷고 있는데 나는 팜플로나까지 갈 수 있는지 확답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렇게 대열에서 벋어나 마을을 빠져나와 카미노 노란 화살표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나처럼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아직 길을 걷지 않고 있던 그때 길 초입에 폴란드 순례자 두 명이 서 있었다.

한 명은  “시몬” 키가 큰 장발의 순례자이고 과묵한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던 곱슬머리 순례자 둘이 함께 길을 걸으려 하고 있어서 나는 이길로 빠져나가면 길이 맞나 물으니 잘 모르는 눈치였다.

우리 모두 초보 순례자이니까.


후반조로 출발한 길에선 새벽에 걸었다면 못 봤을 풍경과 뒤에 줄지어 따라오는 순례자들이 없으니

여유롭고 한적함이 느껴졌다.


폴란드 순례자들은 긴 다리로 빠르게 걸어 나아갔고,

나는 내 걸음을 신경 쓰지 말고 각자의 걸음에 맞춰 걸으라 말을 했다.


이제는 나도 모르게 함께 걸을 때 발을 맞춰야 한다는 강박이 하나씩 벗겨지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속을 비우고 아침에 먹은 거라곤 이온음료와 주스가 다였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나 자신을 최선으로 돌보며 걸어야 했다.


숙소에서의 휴식을 포기하고 걷는 길이기 때문에 절대 안정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우연히 길에서 만났던 아담과 베로니카 부부와 말을 트게 되었다.

어디까지 가는지 물어보니 그들은 팜플로나가 아니라 “빌라바”라는 팜플로나 전 도시에 머물 예정이라고 했다.


살짝 충격이었던 이유는 빌라바에 대한 정보가 나에게 전혀 없다는 것과 그때 당시 내가 보는 한국인 카미노 앱에는 지나치는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도시를 이들은 미리 알고 준비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들은 "Villava빌라바" 보다 한 블록 더 가면 있는 "Burlada 부를라다"라는 곳에 머무는 잘못 들은 정보이긴 했지만 나에게 "빌라바"는 필연적인 운명이었다는 말밖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La parada de Zuriain

https://maps.app.goo.gl/vnKvGk9mnx8eryE59?g_st=ic


이 미국인 커플과는 길을 걷는 내내 구간마다 마주쳤고, 그들 역시 나의 지팡이로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점심시간 때 같은 음식점에 머물면서 나는 혹시 몰라 시켰던 샌드위치와 토르티야를 먹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부부가 왔을 때 먹겠냐고 물어보니 아담은 나는 더 이상 빵 말고 고기가 먹고 싶다며 , 다른 음식점을 찾아 마을을 돌아다니다 결국 다시 여기 음식점으로 돌아왔었다.


스페인 중학교에서 순례길 현장학습으로 길을 걷고 있어서, 식당 음식이 동이 난 상태였다.

인솔 교사 한 명에 보기에도 감당이 안될 만큼 많은 학생들을 이동시키고 있었는데 캠프 인솔을 해봤던 입장에서 교사가 얼마나 고생일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아담은 그 식당에 남은 고기와 소시지를 다 넣어 샌드위치를 만들어 달라 식당 주인에게 말하며, 머스터드와 케첩을 요청했다.

음식점주는 난색을 표하며 고기에 고기 샌드위치를 만들어 달라는 아담을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베로니카는 아담은 늘 배고파한다고 했다.

강가에 위치한 음식점에 앉아 강을 바라보고 땀을 식혔다.

식사를 마치고 이 미국부부에게 인사를 하고는 나는 먼저 길을 나섰다.


아까 식당에서 만났던 중학생 무리가 땅에 생긴 웅덩이에서 진흙을 얼굴에 바르며 이렇게 하면 피부가 좋아진다며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에게 던지며 놀고 있었다.

어딜 가나 십대들은 뭘 해도 친구와 함께라면 신나는가 보다.


지나가던 우리 순례자들에게 함께 사진을 찍자며 단체 사진을 찍고 왁자지껄하게 한바탕 웃고는 다시 길에 올랐다.


심지어 아까 음식점에서 보잉선글라스를 쓴 미국 남자애가 맘에 드는지 사진을 찍자고 어설픈 영어로 얘기하는걸 남자애가 못 알아듣길래 내가 대신 사진을 찍어 줬었다.


저 에너지가 부럽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면서 떼구루루 구르는 낙엽만 보고도 신이 났던 그때를 회상해 봤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를 가는 새벽길에 어떤 미국인이 본인 모자를 어디 떨어뜨린 것 같은데 혹시 본 적 있느냐고 말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잠이 덜 깬 새벽에 랜턴으로 비추며 물어봤었기 때문에 얼굴이 정확하진 않았지만 실루엣과 목소리로 유추했을 때 아마도 베로니카와 아담이라고 추측했었다. 그때 그 사람들인가 하면서 말이다.

 수비리 가는 길에 가방 매무새를 다듬고 있는 아담과 베로니카와 함께 걷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트게 됐었다.


뭐 아직 까지 우리는 그렇게 친밀한 사이도 아니었고,

나 역시 가방 매무새를 잡으면서 기진맥진했기 때문에 한 번은 가방을 내려놓고 쉬다가 지팡이를 내팽겨 치고 걷다가 다시 지팡이를 찾아오기를 반복하면서 오락가락하는 상태였다.


왜냐하면 언덕길로 오르는 길 오른쪽에는 가로수가 있고 왼쪽에는 양 떼들이 지나다는 풍경이 보였다.

 경치를 구경하며 한눈을 팔다 보니 지팡이를 드는 게 아직 손에 익지 않아 자주 이렇게 잊어버리는 일이 생겼었다.


팜플로나로 가는 길 풍경은 숲과 마을의 조화가 아름다웠고, 피레네와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까지 길들에 비해선 완만한 경사였다.

사람들하고도 말할 기운이 별로 없었어서 오전 내내 그냥 거의 혼자 걸었던 것 같다.


점심때쯤 돼서야 베로니카와 아담과 식사를 하며 무화과나무와 강물이 흐르는 걸 구경하면서 빌라바 라는 마을을 알게 됐다. 그들의 말을 주워 담아 나의 경로로 실행해 옮겼다. 만약 정보를 얻지 못했다면 나는 팜플로나가 답이라 생각하고 숙소를 찾아다니거나 무리해서 더 걷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이 간단하고 쉬운 원리를 나는 머리가 아니라 이제 겨우 체기가 내려간 위장처럼 겨우 겨우 소화시키면서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었달까?


심지어 Zabaldika에서 나타난 성당과 알베르게가 나타났을 때 지도에 있는 길 노란 화살표 그림이 있는 길이 아니라 다른 순례자들이 가는 정상작인 길이 아닌 왼쪽 길을 선택해 순례자들이 보이지 않는 지름길로 길을 다녔다.  낮은 봉우리 한 개를 넘으니 작은 마을 풍경이 고개를 내밀었다. 내려가는 길에서 단체사진을 함께 찍었던 순례자 그룹과 다시 마주치며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걸 알수 있었다.


 나는 그제야 그곳이 빌라바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을 입구 다리 사이로 흐르는 강물과 빌라바의 전경이 시원하게 마음을 씻어주는 느낌이었다.


여기에 베로니카하고 아담이 머물 거란 말이지?

라고 오해 하며 마을 구경을 하고 있었다.

숙소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마을이 아니라

학교와 공공시설이 존재하는 실제 마을 이었다.

마을이 아기자기 하니 마음에 들었다.




나는 빌라바에 도착해 다리를 건너자마자 알베르게를 발견했지만 숙소에 머물 생각이 없었다.

팜플로나의 숙소마다 전화로 예약을 물어보니 주말에 열리는 성인 산페드로 기념일 축제 때문에 이미 숙소가 다 찾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나는 마침 빌라바를 지나는 길이었고 결국 빌라바의 아까 다리를 지나며 봤었던 Albergue de peregrinos de la "Trinidad de Arre"에 전화를 해서 침대가 있는지 알아봤다.


팜플로나를 목전에 둔 이 작은 도시에 머무는 순례자는 극히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순례자들의 숫자에 비해 여유로운 숙소에서 침대를 선택해서 짐을 풀 수 있었다.


이십 킬로도 안 갔던 길이었고, 뭐 제대로 먹은 음식이 없는 상태에서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꾸물꾸물 하늘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프런트에 금발의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나를 맞이한다.


오늘은 예정에 없는 빌라바에서 하루를 보내야겠다.


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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