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고 생각하고 다듬고 마주하며 자라기
“그래도, 아빠의 좋은 점은 어떤 게 있을까?” 갓 고등학생이었던 아들에게 물었다. 웬만해선 단답형 대답이 나올 리 없을 AI 엄선 질문이라고 여겼지만, 야무진 착각이었다. 0.1초쯤 걸렸나?
“없어.”
“엉?”
“…”
“하나도?”
“어.”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던가. 왜 말 거냐는 눈빛은 덤이었다. 뭐야, 몰래 카메라야? 아빠는 쪽박을 찼다.
“아빠가 내 아빠여서 좋아”라고 했던 말을 온몸으로 부인하려는 아들. “아들이 내 아들이어서 기뻐”라고 편하게 말하지 못하게 돼 버린 아빠. ‘베프’가 되겠다는 목표는 애당초 글러 먹었다. 답답한 가슴을 쳤다. 비좁고 못생긴 마음을 드러내지도 못한 아빠의 상처는 사회관계 속에서도 덧나곤 했다.
어린 아들과 밀접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던 세월이었다. 영혼을 갈아 넣었건만 나중에 “아빠, 제발 사과 한 번만 해줘”라고 나오면 어쩌지? 왜 그리 싫은 티를 팍팍 내는 거지?
‘집안에 빠개진 문짝은 없었으니 그게 어디냐’는 다독임이나 ‘그러려니’하는 인정만으로는 허약했다. 서로에게 붙들린 지라 상대 때문에 자기가 무너지는 사이였다. 서로 큰 죄인일 수 없건만 부자 사이만큼 상처를 주고받는 사이도 잘 없었다.
아들은 지금 군 복무중인데 여전히 꺼끌꺼끌한 사이다. 더는 잔혹사로 번져서는 안 됐다. 녀석과 보낸 20여 년을 불러내야 했다. 시인하기 싫은 기억을 시인하고 불리지 못한 상처의 이름도 불러야 했다.
다른 종류의 성인으로 자라는 아들과 아빠. 그 사이에 어느 때부턴가 좀 깊숙한 이슈가 더해졌었다. 서로 다른 가치관, 인간관, 도덕관, 직업관, 정치관, 사회관을 놓고 겨룰 때가 잦아진 것이었다. 기성세대와는 다른 남자로 인정받고 싶은 아들의 장엄한 종합 격투였다. 아빠는 코치나 심판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정신이 드니 이미 격투 상대로 불려 나와 있었다.
‘자녀를 어떻게 키울까?’로는 부족했다. 각자 다르고 부족한 상대끼리 충돌할 때 어떻게 서로 외면하지 않은 채 지속가능한 연결다리가 놓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이야기도 절실했다. 누구나 알지만 여전히 낯선 상호 관용과 존중의 이야기 말이다.
아들과 충돌하며 깨달은 게 있다. 부자갈등이 다른 인간관계 속 충돌 모습과 겹쳐지더라는 것이다. 부모·형제·자매, 부부나 연인, 오랜 친구나 동료 같은 소중한 인간관계들 속 충돌도 밑바닥에는 결국 부자갈등과 엇비슷한 맥락이 흐르고 있었다. 부자갈등은 심지어 세대나 집단 간 극단적 대립이라는 사회적 이슈의 축소판이기도 했다. 달리 섰으나 같은 노을에 젖어 있었다.
한 발 떨어지는 게 좋았다. 부자갈등이라는 나무보다 ‘사람 간 갈등’이라는 숲을 봐야 했다. 그래서 이 책은 부자간 오랜 갈등 기록을 남의 말다툼에 비춰서 보여드린다. 고전 소설, 영화, 희곡 속 등장인물 간 말다툼들을 빌려왔다. 서로 다른 사랑법의 충돌도, 지질한 일상의 옹색한 감정싸움도, 부끄러움끼리 난도질하는 괴로운 싸움도, 생사를 좌우할 살벌한 말다툼도, 크고 높은 가치의 빅 매치도 등장한다.
그 진한 다툼 장면들에 비춰보고서야, 부자갈등을 물들인 묵직한 노을의 지평이 드러났다. 서로 맞서는 공감들을 넘는 공존의 지평이었다. ‘다르고 부족해서 충돌할 수밖에 없는 타인 간의 연결을 떠받치는 원리’가 무엇인지 보였으며, 부자관계도 그 안에서야 단단해졌다. 그렇게 상처입고 생각하고 다듬고 마주하면서 함께 자란 20여 년의 이야기다.
아들과 틀어져 맘이 뒤죽박죽인 아빠들께, 아빠가 미워져 거리두기 중인 아들들께, 특히 사춘기 대전을 앞둔 부모의 마음 다짐에 작은 보탬이 될 글이면 좋겠다. 엄마들에게는 부자 갈등 세계를 엿들을 기회가 될 것이다. 소위 명문대생 아들의 아빠 역시 별 수 없었던 부자 갈등의 나이테가 위안이 될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다.
‘제대로 키우고 있는 거 맞아?’는 슈퍼헤비급 불안이었다. 정답지 가리고 쓰는 오답노트랄까. 세대 간 존경과 보살핌의 서사가 무력해진 시절, 자녀를 어떻게 키울까보다 ‘자녀와 어떻게 만날까’를 떠올리는 게 더 지속가능한 사랑법일 거라 여기는 부모들께 힘이 되면 참 좋겠다.■
이미지 _ nathan-dumlao(unspla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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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무당벌레입니다.^o^
글벗작가님들 환절기에 건강하신지요? 글을 띄엄띄엄 올리네요^^;;;
제 출간 예정작 『서툰 아빠의 마음공부』를 물류 마비, 지갑 봉인의 추석 연휴를 넘기고 출간하기로 확정했습니다.
출간이 늦어지는 와중에, 기다려 주시는 분들만큼 힘이 되는 분들도 없더군요. 과분하게도 오래 궁금해 해주시는 분들도 계셨고 홍보에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순진무구한 기대에, 원고 중 일부 챕터만 공개하려고 합니다. 이번 회차는 프롤로그이며 2~3일마다 올리겠습니다.
출판사와 협의 결과 출간 직후까지만 공개하는 떴다방 연재가 될 듯한데, 그동안이라도 자녀와의 관계, 나아가 소중한 사람 간의 갈등과 대립을 고민하는 모든 분들께 쬐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10월 21일 책 출간과 함께 발행취소시켰습니다)
다음 회차는 목차와 추천사입니다.
본문에 인용된 해외 작품은 모두 영문판, 독문판 발췌 번역 인용이며, 일러스트는 정뱅 작가님(bigbang79@naver.com)께서 기쁘게 맡아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