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화로 가득한 집에서 살았다는 걸 남친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29에 회사에서 만난 그는, 내가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내가 사랑받고 자란 줄 알았다. 부잣집 딸에, 고위 임원 엄마와 교수 아빠 밑에서 걱정 없이 자란 애.
내 친구들도 그랬다. 예전부터.
나는 그게 진짜인 것처럼 굴었다. 뭐, 다들 그렇게 믿었다.
교수 아빠, 고위 임원 엄마, 그리고 비싼 옷과 가방들.
내 친구들도 그걸 보고 내가 부잣집 딸이니 행복할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난 그 생각을 바로잡을 필요를 못 느꼈다. 사실, 오히려 그게 더 편했다.
모두가 내가 걱정 없이 평화로운 집에서 자랐다고 믿었다. 나는 공부 말고는 인생에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 같다고 말하는 친구도 있었다.
밝은 성격, 짖굿은 농담에 유쾌하게 반응하는 모습. 친구들이 쑥덕대는 가십에도 무심한 나는 늘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으니까.
고등학교 때.
누가 누구와 사귀었다더라, 미진이가 희구랑 키스를 했다, 은혁이 민채를 X먹었다고 남자애들 사이에 소문을 내서 민채가 그 말을 전해 듣고 영어 시간에 오열했던 거라더라. 라는 이야기를 친구들이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삼삼오오 모여 주고받아도 나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너 그 이야기 들었어? 글쎄 은혁이가!"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은혁이가 누구냐고 묻는 내 모습을 보며 친구들은 내가 남의 가십에는 전혀 관심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학교에서 집중해야 하는 수업시간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내가 쉴 수 있는 시간에 쉬었던 거다. 점심을 먹지 않거나, 친구들과 쉬는 시간에 매점에 가지 않았던 날들은 나르시시스트 엄마가 던지는 날카로운 말에 매일 밤 울다 지쳐 잠들어 퉁퉁 부은 내 두 눈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나는 나르시시스트 엄마의 폭언과 훈육을 가장한 폭행 그리고 가스라이팅 때문에 매일매일 울며 잠에 드느라 말라가고 있었다. 당시 나에게 친구들의 가십에 동참해서 속닥거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매일이 긴장되는 하루의 연속이었다. 엄마의 표정이 조금만 안 좋아도 나는 소화가 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성적이 떨어지면 무슨 일이 생길지 두려워, 수행평가 점수만 떨어져도 불안해서 하루 종일 힘들었다.
내가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야자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욕실 문을 잠그고 목욕을 하는 그 짧은 시간뿐이었다. 그때만큼은 나르 엄마도, 새끼 나르 언니도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내 방 문을 닫을 때마다 의심과 소리를 지르는 엄마, 조금이라도 엄마의 표정이 어두운 날이면, 나는 식사도 제대로 못 할 만큼 불안해졌다. 그런 날들의 반복이었다.
모두에게 내가 진짜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말하지 못했다. 학교 위 클래스 선생님에게도 진짜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19살이던 그 때로 부터 딱 10년이 지난 후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결혼하고 싶은 남자 친구에게 나는 나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렇게나 밝고 당당해 보이는 내가, 사실은 상처가 많고 어두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는 것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막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