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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ngerine Nov 26. 2024

결혼 전 남편에게 일을 그만둬도 되냐고 물었다


나는 남편에게 물었다. "나, 일을 그만둬도 괜찮을까?"  


결혼 준비에 한창이던 그때, 나는 새로 이직한 회사에 적응하던 중이었다. 이직은 나름의 꿈을 좇기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 AI 기획 분야에 대한 갈망, 그리고 친척의 추천으로 들어간 회사. 하지만 친척 임원은 내 입사 직후 퇴사했고, 혼란과 의문 속에서 나는 일에 몰두하지 못했다. 사실,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 시기는 나에게 생애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으로 남았다. 엄마와 언니로부터 받는 폭언과 폭행은 일상 같았고, 스트레스로 인해 탈모가 찾아왔다.


탈모라는 단어는 남 일이라 여겼던 나는, 그 나이에 머리숱을 잃어가는 내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원형 탈모가 왔을 때까지는 버틸 수 있었는데, 양옆의 구레나룻이 모두 사라지게 되자 나는 패닉 상태였다. 탈모에 좋은 제품을 미친 듯이 사서 쓰고, 닥터 모락이라는 두피관리 업체를 찾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며 외모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탈모는 단지 외형의 변화만이 아니었다. 마음의 균형도 무너져갔다. 그즈음, 회사는 나에게  더 이상 수습 기간을 연장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조직 변경이라는 말이 오갔지만 결국 권고사직으로 이어졌다. 모든 힘이 빠진 나는 실업급여를 받는 조건으로 회사를 떠났다.  그 이후 쉬면서 대학병원을 다니며 탈모는 완치되었다. 물론 고용량의 스테로이드를 처방받으면서 내 몸은 살이 빠지지 않는 몸이 된 것 같아 슬프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 뒤로 나는 새로운 직장에 합격했다. 연봉은 더 높았지만, 남자친구는 반대했다. 그는 "돈보다 중요한 건 네가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야" 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물었다. "나 그냥 일을 그만둬도 될까?"  


남편은 대답했다. "네가 힘들다면 그만둬도 괜찮아."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다시 물었다. 몇 번이고. 남편은 매번 똑같이 말했다. "네가 행복하다면 됐어. 나 혼자 일해도 충분해."  


남편의 이런 말은 나를 낯선 여유로 이끌었다. 평생 처음으로 내 삶의 방향을 고민했다. 예중 입학까지의 바이올린, 그 이후의 대학 입시, 부모의 기대 속에서 나는 나를 잃고 있었다. 내가 원하는 길이라 믿었던 선택들도 사실은 부모가 정해놓은 틀 속에 있었음을 일을 쉬던 당시에서야 깨달았다.  


일을 쉬는 동안, 나는 나 자신을 알아가며 엄마와의 관계를 되돌아봤다. 그녀는 나르시시스트였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결국 엄마와 거리 두기를 결심했다.  


그 시간은 나에게 회복의 기회였다.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던 삶을 멈추고, 비로소 나를 이해하게 되었다.


3년이라는 시간 이후 지금, 나는 다시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동안 남편은 나에게 단 한 번도 일하라는 압박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걱정하며 배려해 줬다.  


나름 모두가 부러워하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집에서 밥만 먹고 똥만 싸는 삶이 된 것 같아서 매우 슬펐는데. 내가 이렇게 사는 것 같아서 슬프다고 말할 때마다 남편은 괜찮다고 위로해 주며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내가 일을 안 하기 때문에 당연히 집안일을 내가 도맡아서 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내가 일을 안 하는 3년 동안 단 한 번도 ‘집안일은 너의 일이야’라는 그 어떤 눈치도 보이지 않게 나를 매우 많이 배려해 주었다. 당연히 내가 집안일을 해야 된다고 말을 해도 남편은 집안일은 같이 하는 거라고 말해 주면서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나에게 그 어떤 눈치도 주지 않았다.


“여보, 내가 이렇게 쉬는 동안 너무 고마워. 미안하기도 하고.”  내가 늘 이렇게 말하면 남편은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쉬든, 일하든, 내가 회사에 나가는 건 똑같아. 여보가 행복하면 돼.”  (나였다면 학벌이 아까우니 취업을 하라고 몇 번이고 말했을 텐데.)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나였다면 잔소리를 백번도 했을 것이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3년 동안 열 번은 잔소리를 했을 것이다. 취업하라고.


나는 그가 혼자 감당해야 했을 경제적 부담과 마음의 무게에 매번 미안했다. 몇 달 전, 나는 다시 일할 용기를 냈다. 이제 나는 곧 새 회사에서 첫 발을 내딛는다. 떨리지만, 내가 다시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내게 무조건적인 사랑과 기다림을 보여준 남편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출근을 앞두고 오만가지에 걱정하는 나를 믿고 응원해 주는 남편, 고마워.

내가 더 잘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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