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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숙에서 영어 공부를

과외 오빠

by 솔향

그 오빠를 다시 봤다. 대학교 2학년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31년 만인가. 물론, 달려가 반갑게 인사하지는 않았다. 운전 중이었다는 핑계도 있었지만 좁은 주택가 골목길이었기에 알은척하려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천천히 차를 담벼락 옆에 세우고 썬팅된 창문 안에서 그가 걸어가는 걸 지켜봤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별다르게 변한 것 같지 않았다. 신기했다. 예순이 다 되어 갈 텐데 여전히 소년의 이미지가 보인다. 크지 않은 키에 가늘고 가냘픈 호리호리한 몸. 헐렁한 바지가 추워 보인다. 젊은이나 입을 법한 깔끔한 회색 맨투맨 티셔츠에 흰 운동화를 신었는데 걸음걸이도 통통 튀는 게 중년의 것이 아니었다. 결혼은 안 했구나. 100 퍼센트다. 음, 세상에 완벽한 건 없으니 99 퍼센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다가 이내 달리기 시작하더니 얼마 안 가 초록색 쪽문을 철컹 열고 들어가 계단을 오른다. 낡은 주택 이층의 현관문을 열고 쏙 들어간다. 저기서 영어과외라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걸까? 아니면, 직업이 따로 있나? 풋, 그의 걱정을 하는 내 오지랖도 참 찰랑찰랑 넘친다.


실은 그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이도 잘 모르겠다. 요즘 기억력에 문제가 깊다. 옆집 살던 같은 반 친구 근영이 오빠의 친구였고, 우리가 고등학교 2학년일 때 미국 무슨 주립대에서 유학을 2년 마치고 왔다고 했으니 적어도 다섯 살에서 일곱 살은 더 많을 것이다.


그를 알게 된 건 공짜로 영어과외를 해 준다고 해서다. 근영이 오빠가 동생의 과외를 부탁했던 모양인데 친구를 더 데려와도 된다고 했나 보다. 학교에서 버스 타고 한참 가 공부하고, 밤늦게 다시 집에 돌아와야 하는 터라 혼자 다니는 것보단 걱정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 가난해서 학원 한 번 다녀 본 적 없는 나도 웬 떡이냐 싶었다.


그의 집에 간 첫날을 잊지 못한다. 목포역 옆 여인숙이 즐비한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 근처 어딘가에 홍등가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 근방인가 싶어 머리가 쭈뼛 섰다. 우리가 과외받을 곳은 거기 여인숙 중 하나였는데, 그 오빠 부모님이 운영하는 오래된 곳이었다. 1층은 간단한 잡화를 파는 것 같고, 삐걱거리는 계단을 걸어 2층에 오르면 손님방이 대여섯 개쯤 기역자로 자리하고 있었다. 좁은 복도에는 모노륨 장판이 깔려 있다. 문이 열려 있는 방을 곁눈질하니 하나같이 두 명이 누우면 꽉 찰 만큼 작고 세간 없이 덩그랬다. '토지' 드라마에서 서희와 길상이 목도리를 던지며 사랑싸움을 했던 회령 여인숙이 떠오르는 구식 숙소였다. 아무리 공짜라지만 여인숙이라니. 물정 모르는 어린 나이에도 뭔가 께름칙했다. 집을 알려주려고 같이 온 근영이 오빠를 쳐다봤다. 오빠가 설마 우리를 믿을 수 없는 곳에 보내지는 않겠지, 암. 게다가 제일 친한 친구라니 괜찮을 거라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다독였다. 근영이는 미리 언질이라도 받았는지 표정에 동요가 없다.


거기 방들 중 제일 큰 데로 들어갔는데, 이미 다른 여학생 두 명이 과외할 오빠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제일여고생이라고 했다. 처음 본 그는 비쩍 마르고 머리카락과 손가락이 가늘었다. 눈은 크고 좀 튀어나왔는데 목소리가 맑았다. 대학 가요제에 나온 신해철 느낌도 풍겼다. 좀 더 순한 신해철이랄까. 그건 그렇고, 이런 집에서 어떻게 미국 유학까지 보냈는지 의아했다.지금은 이래 봬도 예전엔 여인숙으로 쏠쏠하게 돈 좀 번 집안인가?


성문 종합 영어를 밥상 위에 펴고 일주일에 두 번씩 다같이 공부했다. 방은 오빠가 쓰는 방인 듯했고 공부하러 다니는 몇 달 동안 여인숙에 손님이 드는 것은 보지 못했다. 여인숙을 폐업하고 가족들의 거처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오빠는 생각보다 영어 문법을 제대로 가르쳤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나 미국 문화를 잠깐씩 이야기해 주기도 했다. 유학까지 다녀왔으면 직장이나 구할 것이지, 백수 주제에 무료로 과외나 해 주고 있다며 속으로 한심해하기도 했다. 는 외모가 어려 보일 뿐 아니라 말하는 것도 또래보다 순수해서 그런지 남자로서의 매력은 부족한, 조금 서툴러 보이는 편이었다.


그곳에 그리 오래 다니진 않았다. 두세 달쯤? 그만둔 이유는 돈을 안 내고 계속 배우는 것이 맘에 걸렸을 뿐 아니라 딱히 성적이 오르지도 않아서다. 처음 품었던 열정은 사라지고 숙제를 안 해 가는 날이 많아 오빠가 한숨을 쉬었다. 과외고 나발이고 설명을 듣고도 시간 내서 자기 공부를 안 하면 말짱 헛것이라는 말씀이다. 게다가 더 깜짝 놀랄 이유가 있었으니 그 유창한 꼬부랑말 실력자 과외쌤이 글쎄, 제일여고생 중 짧은 커트머리 여자애랑 사귀게 됐다며 당당하게 발표했다는 어이없는 사실이었다. 우리가 보는 상황은 경악 그 자체였는데 그 둘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가만, 이거 범죄 아닌가? 미성년자인데? '친구야, 너희 부모님이 아시면 기절하시겠다. 어이, 과외쌤 오빠, 나이 먹고 그러고 싶어요? 미쿡 물을 잡수셔서 그런지 개방감이 장난 아니시네요.'


90년대 한국에서 별일을 다 목격하는 바람에 놀라서 벌어진 입은 아직 다물어지지도 않았는데, 스토리는 신속하게 더 이어졌다. 새로운 미국 문화의 전파자답게 얼마 안 가 둘은 재빠르게 헤어졌다. 공부 시간에도 어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제일여고생 둘이 눈을 내리깔거나, 가끔 흘기거나 하더니 그만 뒀다. 근영이랑 나도 자연스럽게 무료 과외는 이만하면 됐고, 충분히 염치없다는 결론에 이르러 과외방은 자연스럽게 그 문을 닫게 되었다. 떠날 때 마주한 그의 눈이 슬퍼 보였다.


그 뒤, 내가 대학에 합격하자 축하 전화를 하더니 아주 가끔 안부를 물어왔다. 2학년 어느 날, 광주에 사는 친구를 데려다줄 일이 있다며 가는 길에 내려 준다고 해 차를 얻어 타고 간 적이 있었다. 도착해 셋이서 밥 먹고 볼링을 한 게임 다. 처음 볼링을 배운 거였는데 재미가 솔찬했다. 그것이 문제였나? 볼링 치며 즐거워하던 내게 반한 건가, 아님 어린 여자애들 킬러인가.


그때부터 주말이면 한번 보자며 목포 집에 전화를 걸어왔다.(자취방엔 전화가 없었고, 주말이면 늘 집에 내려갔으니까.) 제일여고 여학생이 떠오르며 소름이 끼쳤다. 안 만나겠다고 했더니 밥 한번 먹자는데 왜 안 되냐며 스토커처럼 밤에도 전화했다. 나중엔 나를 좋아한다며 심지어 울기도 했다. 뭐 볼링 한 번 쳤다고 좋아해? 아마 술을 마신 것도 같았다. 전화하지 말라고 화내며 끊는 걸 몇 번 본 엄마가 어느 날, 전화기를 빼앗더니 냅다 우레 같은 목소리로 욕을 날렸다.


"야! 이 상♡의 새♡야! 어디 한밤 중에 남의 귀한 딸한테 전화해서 지♡이여. 한 번만 더 전화하면 죽여불 줄 알어!"


오 마이 갓! 엄마가 그렇게 시원하게 욕하는 걸 이전에도, 이후에도 맹세코 들은 적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그 오빠는 다시 연락하지 않았다. 스토커인 줄 알았는데 나름 소심한 남자였다. 근영이한테서 다시 미국으로 들어갔다고 들은 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렇게 30년이 넘도록 기억에서 사라진 사람을 떡하니 마주친 것이다. 뱀파이어처럼 여전히 소년 같은 모습에 웃음도 나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던 시절이 그립기도, 씁쓸하기도 하고, 너무 빨리 흐르는 세월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여튼 옛날 사람 하나에 스산스럽다.


다시 마주쳐도 역시 다가가고 싶 않다.

그저 달려가던 가벼운 뒷모습처럼 그가 자유롭기를 빌어 줄 순 있다. 단정적인 내 예상과 다르게 따뜻한 사람이 곁에 있으면 더 좋겠다. 그땐 이상한 오빠로만 보였지만, 어쩌면 제 감정에 충실했던 순수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속속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경솔하게 말만 많은 나보다도 훨씬 깨끗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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