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리니가 종교적인 주제에 목가적 풍경을 접목시켜 종교적이면서도 시적인 풍경화풍을 창시했다면 그의 제자였던 조르조네(Giorgione, 1477-1510)는 이런 목가(牧歌)적 전통(pastoral tradition)을 이어가되 비종교적 주제를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조르조네는 이탈리아 시인 자코포 산나차로(Jacopo Sannazaro, 1458-1530)의 목가『아르카디아 Arcadia』(1480)에서 묘사되는 전원적인 삶의 모습을 그의 그림에 담아내고자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테오크리토스(Theocritus)와 버질(Virgil)과 같은 고대 목가시인들의 영향을 받아 그들 작품에 등장하는 목가적인 이상세계를 그림으로 재현하여 이른바 아르카디아적 풍경화(Arcadian landscape)를 창시했습니다.
아르카디아는 실제 고대 그리스 중부의 초원 지역으로 헤르메스(Hermes)의 아들인 목신(牧神) ‘판(Pan)’이 다스리던 영역으로 전해집니다. 고대 목가시인들은 이 지역을 대자연의 풍요로움이 가득한 유토피아, 즉 이상향으로 묘사했고 고대 그리스와 로마 고전주의에 매료된 르네상스 시대 이후부터 아르카디아가 조르조네와 같은 화가들에 의해 그림으로 구현되기 시작했습니다.
조르조네의 대표작 <폭풍 The Tempest> (1508)은 서양미술사에서 첫 번째 풍경화로 알려지는데 작품의 명확하지 않은 주제가 약간의 불편함을 주는 그림입니다. 작품 속 목동과 수유 중인 여인은 비교적 아르카디아적 소재로 이해되지만 이상하리만큼 그림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며 그림 속에서 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덕분에 번개가 치는 언덕을 따라 그려진 도시의 풍경이 오히려 이 그림에서 독자적인 주제이자 작품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듯합니다. 이런 화가의 시적이면서 암시적인 풍경화는 당대 미술의 혁신을 가져왔고 그의 성과는 티치아노를 비롯한 조르조네의 추종자들에 의해 계승되었습니다.
조르조네 <해질녁 Il Tramonto (The Sunset)> (1506-10). Image source: National Gallery, London.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 <해질녘 Il Tramonto (The Sunset)> (1506-10)은 조르조네의 그림으로 소개되지만 논쟁이 분분한 작품입니다. 말을 탄 조지 성인(Saint George)과 말발굽아래 드래건이 그려진 부분은 원작의 손상이 워낙 심해 1930년대에 복원을 하는 과정에서 추가로 그려졌으며 오른쪽 어두운 동굴 구석에 은자(hermit)와 호수의 괴물 역시 상당 부분 새롭게 칠해졌습니다. 내셔널 갤러리 측은 이 그림의 이런 여러 요소들보다는 후경에 사용된 풍경화법에 근거하여 조르조네가 이 작품을 그린 것이라 설명합니다.
좌: 벨리니 <고뇌하는 그리스도 The Agony in the Garden > (1458-60). Image source: National Gallery, London.
저 역시 이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조르조네의 스승인 벨리니의 <고뇌하는 그리스도 The Agony in the Garden > (1458-60)의 목가적 풍경화법이 떠올랐습니다. 동시에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조르조네의 다른 작품인 <폭풍> 속 인물들 또한 생각이 났는데요. <해질녘> 속의 두 목동도 큰 의미는 없어 보이지만 전체적인 그림의 목가적 분위기에 비교적 잘 스며든 모습입니다. 이 작품이 조르조네의 작품인지 아니면 벨리니의 공방에서 제작된 작품인지는 불명확하나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벨리니로 시작하여 조르조네, 티치아노로 이어지는 베네치아파의 목가적 혹은 아르카디아적 풍경묘사는 이후 17세기 풍경화가 독립적인 하나의 장르로 자리 잡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참고문헌: Allan R. Ruff, Arcadian Vision: Pastoral Influences on Poetry Painting and the Design of Landscape (Oxford: Windgather Press,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