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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의 의미

갈색 진주가 주는 재미

by 전수현

습하고 더운 날씨가 가고 비가 내린 후 쌀쌀한 날씨가 되었다. 날씨 변화에 사람들 생활도 변했다. 늘 운동하던 사람들은 더우나 그렇지 않으나 운동하겠지만 날씨 핑계를 대고 운동을 설렁설렁하던 사람들에게는 운동하기 좋은 계절이 되었다. 더우면 밖을 안 나가는 사람들은 운동하겠다고 계획만 세우지, 운동을 안 하는 편이다. 그러는 동안 살이 찌고 계절은 바뀌었다.


여름 하늘도 예뻤을 텐데 가을 하늘이 더 하늘빛을 자랑하고 하얀 구름이 모양을 내주는 듯한 건 날씨처럼 좋아진 기분 탓일 수도 있다. 걸으면서 하늘도 시원하게 보고 가을을 알려주는 계절 식물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가을 산책 중에는 흙바닥에서 진주를 발견할 수도 있다. 아침 일찍 먼저 이 길을 지나간 사람들이 다 가져간 후라 거의 없을 때도 있지만 흙바닥에서 갈색 진주 도토리를 발견하면 미소가 지어진다. 도토리를 줍는 시기는 선선하고 가볍게 발걸음을 내던 시간으로 남아있다. 몇 알 주어와 책상 위 한편, 책꽂이 한쪽에 보기 좋게 올려두면 가을의 한 찰나를 나누어 가진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어느 날은 담을 것을 챙겨 들고 허리를 숙여 도토리를 줍는 할머니를 보며 저 사람이 경쟁자라고 저 사람이 다 가져가서 가을 산책에 재미인 도토리가 한 알도 없는 거라고 실망했다.

도토리나무들 사이 산책길에 비닐봉지를 한 손에 들고 허리를 숙이며 바닥을 고르는 어린이를 보았다. 멀지 않은 곳에 엄마로 보이는 사람도 보였다. 가까이 지나갈 때 보니 이미 비닐봉지 절반 정도를 채웠다. 많이 주은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갈 길에는 도토리가 없겠구나 했다. 작은 숲 바닥에는 빈 도토리 껍데기들만 한참 보인다. 도토리나무 길이 거의 끝나갈 무렵 반질반질 갈색빛을 내는 것이 보인다. 속이 말라서 쓸모없는 도토리가 아닌 알맹이가 꽉 찬 것이다. 조금 놀라고 반가운 마음으로 한 알 주어 올리며 주변을 살피니 몇 개가 더 있다. 서너 알 주어 올린 후 허리를 펴니 하늘에서 도토리 한 알이 뚝 떨어진다. 늦게 떨어진 도토리 덕분에 나는 가을 산책의 기쁨을 또 느낀다. 그리고 뒤 돌아 엄마와 도토리 줍기가 한창인 아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많이도 말고 두세 알만 있어도 행운을 나눠 가진 기분이었다.


많이도 필요 없고 조금만 있어도 되는데 이미 먼저 기회를 채간 사람들 때문에 나에겐 실망만 남은 날도 있었다. 내가 늦은 걸까 좀 더 빨리 준비했다면 어땠을까 후회와 자책이 나를 괴롭게 한 날도 있었다. 그런데 남보다 늦은 것도 아니고 내 타이밍이 아니었을 뿐이다. 어쩌면 늦은 건 아닐까 걱정하던 순간에 눈앞에 떨어진 도토리처럼 지금이야 라고 말해주는 날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늦었다고 자책 말고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 내 길을 묵묵히 가는 것이다. 그리고 내게 행운이 왔을 때 기회를 잡으면 된다.


오늘 도토리 행운을 준 이 길은 다른 계절과 같은 곳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몇 년 산 동네지만 계절마다 다른 풍경이 새로운 재미를 준다. 그리고 오늘은 갈색 진주를 얻어 책꽂이 사이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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