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옥아, 도화지는 네가 가져올래? 나는 콤파스 찾아올게.”
서울 이모가 공부 잘하는 언니에게 선물로 준 콤파스는 우리 자매의 자랑이었다. 동생 미옥이와 나는 겨울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각자의 계획을 세우겠다고 들떠 있었다. 도화지 위에 콤파스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알록달록한 색연필로 계획표를 짜며 “이번 방학은 정말 알차게 보내자!”고 서로 다짐했다.
하지만 벽에 붙은 계획표는 점점 우리 일상에서 사라져 갔다. 벽지처럼 무심하게 붙어 있을 뿐, 방학의 현실은 다르게 흘러갔다.
“얘들아, 얼랑 목욕하러 내려와!”
엄마의 힘찬 목소리가 부엌에서 울려 퍼졌다. 부엌 아궁이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는 김으로 가득 차 있었고, 김장할 때 김치 절이고 속 버무려 놓던 빨간 대야 두 개에 끓인 물이 가득 담겼다. 우리 세 자매는 차례로 엄마에게 때를 밀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정기적으로 하는 목욕 행사다.
언니는 발바닥이 간지럽다며 깔깔 웃었고, 미옥이는 아프다며 투덜댔다. 나는 늘 마지막 순서였다. “너는 때가 잘 밀린다”는 엄마의 칭찬에 내심 뿌듯하면서도, 나의 무딘 감각이 엄마를 덜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순서라 내 몸에 불어서 붙어 있는 때는 너덜너덜한 나뭇가지처럼 손만 대면 부드럽게 떼어졌다. 목욕 후, 온몸은 날아갈 듯 가볍고 개운하다. 목욕한 부엌을 힘들게 청소하는 엄마를 뒤로하고 우리는 방학의 시작을 친구들과 함께하기 위해 밖으로 뛰어나갔다.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동네에서 떨어진 미영이네 집으로 향했다. 미영이네 집 근처는 초가집이 몇 개 있고 겨울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다. 초가집 지붕에 맺힌 투명하고 맑은 고드름을 따서 아이스크림처럼 먹고, 몇 일전 눈이 와 쌓여있는 눈 언덕에서 눈썰매를 타며 깔깔거렸다. 맨손으로 눈사람을 만들다 보면 방금 깨끗해진 몸은 금세 땀과 먼지로 다시 더러워졌다.
그렇게 온종일 놀다 보면, 우리는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존재가 된 듯했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 벽의 계획표는 한 번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우리의 실패를 조용히 증명하고 있었다. 남은 방학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희네 집으로 달려가 탐구생활 책을 빌렸고, 매일 같은 놀이만 했던 동생과 나는 일기를 나눠 쓰며 일기장을 채웠다.
결국 숙제를 마쳤지만, 밤이 되니 방학 동안의 과한 놀이 탓인지 몸에 열이 올라왔다. “이게 내게 내린 벌인가?” 온몸은 아프지만 한 달 동안의 자유가 나의 몸과 맘을 크게 했다.
지금 돌아보면, 엄마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우리를 목욕시키며 쏟은 정성과 사랑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계획표는 실패했지만, 그 방학은 우리 가족에게 따뜻하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미옥아, 그때 도화지랑 콤파스 잘 챙겼지?”
시간이 흘렀지만, 그 겨울방학의 기억은 우리를 여전히 미소 짓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