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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 혜성님 Nov 09. 2023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 가는 인생길

외삼촌의 죽음을 기억하는 글~

나이 마흔이 된 삼촌이 죽었다. 그것도 칼에 찔려 죽었단다. 이놈도 죽고 저놈도 죽고, 굶어 죽고, 나라에서 사람들을 총으로 쏴서 죽이던 시기라 죽음에 감각이 무뎌질 만도 한 시기였다. 그래도 내 가족의 죽음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삼촌의 죽음에 대한 슬픔보다는 남겨진 삼촌의 세명의 딸들이 걱정되었다. 영미, 윤미, 설미 내 사촌들이었다. 아들을 낳아서 집안에 대를 이어야 한다는 할머니의 성화 때문에 딸만 줄줄이 셋을 낳고 구박덩이 며느리 살던 삼촌 어머니는 불쌍해서 어떡하나. 누구보다 걱정이 됐던 사람은 할머니였다. 평생을 외아들만 바라보며 살아온 할머니가 6개월 전에 중풍으로 쓰러졌다. 반신을 못 쓰게는 되었지만 조금씩 회복의 기미가 보여 가족들이 기대하고 있었다. 금쪽같은 외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곡기를 끊고  저승으로 아들을 지켜주러 따라갈 것 같아 온 가족이 그 소식을 숨기려 애를 쓰고 있었다. 할머니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할머니에게 삼촌은 세상 전부였다. 큰 딸 영미는 아버지가 죽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지 굳게 닫힌 입을 좀처럼 열지 않았다. 네 살 난 둘째 윤미는 아버지 제사상에 올랐던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북한의 가난은 네 살 난 아이의 뱃속도 채워주지 못했다. 두 돌을 갓 맞은 막내 설미는 뭔가 느껴지는 게 있는지 순하던 아이가 유난히 보채고 엄마 품에서 순간도 떨어지지 않으려 애를 썼다.


삼촌은 키가 크고 호남형으로 잘 생긴 사람이었다. 또렷하고 둥그런 눈가에 짙은 쌍꺼풀이 있었다. 콧날도 날렵했다. 얇은 입술 사이로 허연 덧니를 드러내며 허허 웃을 때면 성격 좋은 사람 같았고 호탕해 보였다. 동네에선 삼촌을 홍길동이라 불렀다. 삼촌을 짝사랑하던 동네 처녀들도 많았었다고 했다. 할머니에게는 엄마와 이모, 그리고 삼촌 이렇게 삼 남매가 있었다. 이모는 막내라 사랑을 주고 삼촌은 아들이라 정성을 들였다. 할머니가 구부정한 허리로 기어 다니며 방을 닦을 때면 기다란 다리를 윗방 문턱에 올리고 누워 책만 보고 있었다. 할머니는 삼촌의 오른쪽 다리를 들고 공간을 만들어 방바닥을 닦고, 왼쪽 다리를 들고 방바닥을 닦고 다시 내려놨다. 엄마는 동네 우물가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지게에 물을 날랐다. 삼촌은 외아들이라고 쌀밥만 먹여서 키웠다. 할머니는 끼니마다 무쇠가마에 옥수수쌀을 씻어 안치고 그 위에 흰쌀을 씻어 조심스럽게 얹어서 밥을 했다. 다 익은 쌀밥을 풀 때면 주걱을 들고 옥수수쌀이 섞이지 않게 쌀알만 거둬 삼촌 밥그릇에 담아내려 정신을 집중했다. 삼촌은 40년 인생 내내 쌀밥만 먹고살았다.


삼촌이 죽기 전 몇몇 사건들이 기억이 났다. 아버지가 집 뒤 야산에 덫을 놨는 데 산토끼가 걸렸다. 고기 맛을 못 본 지 일 년은 더 되었다. 사람이 동물성 단백질을 못 먹으면 페라 그라라는 병에 걸린다. 손등이며 발등 그리고 혓바닥이 쩍쩍 갈라져서 피가 나는 병인데 고기를 먹어주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올무에 산토끼가 걸리면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을 부어 털을 벗겨 낸다. 별다른 양념은 없다. 그냥 커다란 무쇠솥에 물을 가득 붓고 산토끼를 넣고 소금이 있으면 대충 뿌려서 푹 삶아 낸다. 그리고 삼촌, 사촌들 할머니까지 데려다 고기 국물을 우려내서 마셨다. 삼촌은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그날따라 산토끼 고기를 참 맛있게 먹었다. 옆에 조카들도 있고, 어린 자식들도 있는데 먹어보라고 하지도 않고 아버지가 권하는 대로 정신을 놓고 먹었다. 삼촌이 평소와는 좀 달라 보였다. 평소와는 다른 싸한  그런 느낌이 있었다.


'죽기 삼 년 전에 정신이 나간다.'라는 말이 있다. 삼촌은 종산리 3 작업반 트랙터 운전수였다. 리에서 김일성 선전실을 새로 짓는다고 리당 청사 옆 극장을 허무는 일에 동원되었다. 지붕을 허물고 양면의 벽을 전부 다 뜯어내고, 정면 벽 하나만 남았는데 점심시간이 되었다. 건설 현장 지식이 없는 농부들은 홀 벽 뒤에 그늘에 의지해 점심을 먹다가 벽이 넘어지면서 그 아래 깔려 다 죽어버렸다. 삼촌도 현장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넘어진 벽은 삼촌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덮쳤다. 마주 앉아 시답지 않은 얘기를 나누며 주린 배를 채우던 동료가 누렇게 식은 옥수수밥을 입에 넣은 채 삼키지도 못하고 눈앞에서 즉사했다. 여덟 명이나 죽었다. 시골이라 어느 집에 숟가락 몇 개 있는지 다  아는 게 북한 농촌이다. 그런 동네에서 한날한시에 가장이 여덟 명이나 죽어버렸다. 삼촌이 극장 해체 현장에서 구사일생 목숨을 건진 얘기를 엄마에게 하는 걸 내가 옆에서 듣고 있는데 횡설수설하는 게 정말 정신줄을 놓아 버린 사람 같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세상에 미련을 내려놓은 듯했고, 마음을 제대로 붙잡지 못하고 사는 사람 같았다. 내가 알던 삼촌은 똑똑하고 꿈도 있었고 누구보다 조카와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시절을 기점으로 좀 이기적으로 변해 갔던 것 같다. 2002년 12월 21일이었다. 갓 가을을 맞이했던 터라 집에 쌀이 좀 남아있었다. 수확한 지 얼마 안 된 팥도 있었다. 엄마가 올해 동지에는 팥죽이나 끓여 먹자고 하면서 불린 쌀을 담은 대야를 내 머리 위에 얹어 주며 방앗간에 다녀오라고 했다. 방앗간은 2 작업반에 있었다. 방앗간 종산리에 하나밖에 없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기계 소음이 듣기 싫어서 밖에서 시간을 보내려 나왔다. 오후 대여섯 시쯤 됐던 것 같다. 짧은 겨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익숙한 실루엣에 자전거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이 보였다. 삼촌이었다. 그때 왜 그랬는지 삼촌을 꼭 보고 싶었다. "삼촌!" "삼촌!" 한 네 번을 소리에 소리를 지르며 불러 댔더니, 자거를 세우고 내 쪽으로 돌아봤다. 삼촌의 특유의 미소가 있었다. 허연 덧니를 드러내면서 웃으며 여긴 어쩐 일이냐고 물었다. 엄마의 심부름으로 방앗간에 왔다고 하면서 짧은 인사를 했다. 이상하게 자꾸 삼촌이랑 얘기를 하고 싶었다. 방앗간 앞에 서서 한 20분은 떠들었나? 그리고 헤어졌는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외갓집에서 컸다. 삼촌과 이모, 외할머니 그리고 사촌들과 추억도 많았고, 그만큼 외가 식구들과 애정도 많다. 삼촌은 나를 첫 조카라고 사랑해 줬다. 장가가서도 자기 딸들과 차별하지 않고 나를 자식처럼 이뻐했다. 그런 외삼촌이 죽었다니 그것도 사고사도 아니고 타살이란다. 삼촌이 누군가와 척을 지고 살아갈 사람도 아닌데 칼에 찔려 죽었다니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졌을 무렵 행불 됐던 이모에게서 연락이 왔다. 할머니는 거동이 불편했으니, 삼촌이 대신 연락을 받았다. 집안 어른들은 자세한 내용을 우리 아이들에게 설명하길 꺼려했었다. 집안 모임이 잦아지고 아이들끼리만 따로 남겨두고 어른들끼리만 수군대는 그런 일이 여러 번 반복이 됐다. 눈치가 빨랐던 나는 집안에 분명히 무슨 일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머니에게 이모가 어디 있냐 물었다. 거짓말을 못 하는 엄마는 얼버무리며 이모는 남포 청년 고속도로 돌격대에  지원해서 남포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남포에 갔다면 국가에서 조직적으로 데려간 건데 보위지도원이 와서 이모의 행적을 묻냐고 따졌다.


엄마는 비밀이라고 하면서 이모가 중국에 있다고 했다. 중국에 있는 이모가 삼촌을 통해 가족들에게 큰돈을 보내왔다고 했다. 2002년도 후반이었는데 이모가 보냈다는 돈 액수가 상당히 큰돈이었다. 북한 돈으로 80만 원쯤 됐었는데, 강냉이를 2톤은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이게 얼마나 큰돈이냐면, 농장원들의 일 년 분배가 150킬로쯤 받았었는데 2톤이면 10년쯤 모아야 하는 돈이다. 한국은 노동을 하면 월급을 받지만, 북한은 강냉이나 쌀 그리고 옥수수 국수 같은 현물을 받았다. 삼촌은 누나인 엄마에게 30만 원을 줬다. 나머지는 할머니 뇌졸중을 치료하는 약도 사겠다고 했다. 이모가 돈을 보내면서 삼촌에게는 일본제 중고자전거를 사라고 했고,  할머니의 남은 인생을 쌀밥에 고기만 대접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했다. 삼촌은 이모의 부탁대로 할머니 밥상에는 삼시 세끼 쌀밥과 고기를 올렸다.


삼촌은 이모에게서 받은 돈이 생긴 후 은덕으로 자주 다녔다. 농촌에는 암이나 뇌출혈 환자들을 위한 약이 없다. 진료소라고 작은 병원이 있긴 한데 사실 유명 무 실했다. 의사가 처방전을 써 주면 처방전을 들고 시장에 나가 중국산 약을 구입해야 했다. 농촌은 시장이 없으니 삼촌은 일본제 중고 자거를 타고 은덕을 자주 드나들며 할머니 약재들을 구입했다. 은덕에는 삼촌 고향 친구들이 많았다. 종산과 은덕 군은 24킬로미터였는데 중간 즈음  금송리와 박상 사이를 잇는 강팔령이라고 부르는 가파른 산이 있었다. 은덕에서 종산으로 오는 길은 오르막이 완만하지만, 종산에서 은덕으로 가는 방향의 오르막은 가파르다 못해 오르다 보면 등에서는 땀이 흐르고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삼촌은 할머니를 살려 보겠다고 자전거로 한 달에 한 번꼴로 은덕과 종산리를 왕복했다. 삼촌은 은덕에 갈 때마다 공향 친구 집에서 하룻밤 자고 그다음 날 고향으로 돌아오곤 했다. 평생을 친하게 지내던 고향 친구가 삼촌을 칼로 찔렀다. 삼촌을 칼로 찔러 죽인 사람은 노동당원이었다. 용철이라는 사람이었는데 나도 몇 번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삼촌은 노동당 원인 용철이를 부러워했다. 북한이 가난해지고 국가가 기능 상실하자, 노동당원에게도 배급을 줄 수가 없었다. 용철이는 삼촌을 고향 친구로 생각하고 북한 정권을 비판하고 세상을 비관하는 이야기를 했다고 했다. 삼촌은 노동당인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술에 취한 친구는 자기 의견에 삼촌이 동조하지 않는다고 홧김에  칼을 들어 찔렀다. 칼은 정확히 삼촌의 횡격막을 뚫고 지나갔다. 용철이의 아내가 밤이 새도록 삼촌을 간호했다. 범죄사실이 들킬 가봐 무서워 병원에도 안 데려갔다고 한다. 밤새 고통에 몸부림치다 은덕에서 숨을 거뒀다.


12월 24일 삼촌이 사망 소식이 종산리에 전해졌고, 삼촌 어머니가 제일 먼저 들었다. 허둥지둥 우리 집에 달려와 목이 터져라 울었다. 삼촌이 우리 곁을 떠나서 돌아오지 못할 것으로 갔다지만 마음 놓고 슬퍼할 수도 없었다. 삼촌을 칼로 찌른 사람이 노동당원이었기 때문이다. 삼촌은 정치범의 아들이다. 노동 당원이 정치범의 아들을 칼로 찔렀다. 이건 국가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내사촌들의 운명이 바뀌는 문제다. 다행이었던 건 술자리에 삼촌과 용철이, 용철이 아내, 그리고 용철의 입당을 보증해 줬던 보증인이 동석했었다. 보증인은 다음날 아침 술에 깨서 안전부로 가서 일체 사건을 진술하고 당적 책임을 지겠다고 양심선언을 했다. 당원의 자질이 없는 사람을 보증했으니 당의 결정에 따라 당원증도 내놓겠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듣고 우리는 한시름 놓았다. 이제야 삼촌의 죽음을 마음 놓고 슬퍼할 수 있었다. 사람이 죽었으니 관을 짜야했다. 기다란 널판자를 두 개씩, 상하좌우에 대고 못질을 하고 시신이 빠져나가지 않게 앞뒤를 막은 허름해 보이는 관이 쇠달구지에 실려 할머니네 집 앞에 왔다. 대패질도 안 했는지, 톱밥이 여기저기 묻어 있는 초라해 보이는 나무관이었다.


삼촌은 나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다음날인 12월 22일에 은덕 군으로 갔다가 23일 날 고인이 되어 저승 사람이 되었다. 삼촌 시신이 담긴 나무관이 고향사람들의 손에 들려 고향 뒷산으로 향했다. 엄동설한인 12월 말이라 땅이 안 파졌는지 구덩이가 너무 얕았다.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저 허름한 관에 몸을 뉘어있을 삼촌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팠다. 고향사람들이 삽과 꼭괭이로 땅을 팠는데 땅이 많이 얼어서 안 파진다고 했다.  어머니가 통곡을 하며 삽을 들고 구덩이 안으로 들어갔다. 언 땅에 삽이 안 들어가자 두 손으로 막 파냈다. 사람들이 달려와 말렸다. 그리고 여러 장정들이 곡괭이로 땅을 파는데 정말로 안 파졌다. 삼촌의 관이 언 땅 위에 놓였다. 삼촌어머니가 삼촌 무덤이 될 주변의 흙을 두 손으로 한 움큼 잡아 관위에 뿌렸다. '잘 가요. 또 만납시다.' 엄마의 울음소리에 삼촌어머니 통곡소리에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삼촌 관위로 수많은 흙이 쏟아서 떨어졌다. 움푹하게 파여 있던 무덤은 순식간에 수평으로 흙이 채워졌다. 그리고 둥그렇게 흙을 조금 높이 쌓아 이곳이 무덤임을 나타냈다.

 

삼촌이 죽은 후 한 달을 겨우 버텨내고 1월 31일 할머니도 죽은 외삼촌을 따라갔다. 할머니는 삼촌이 죽었다는 얘기를 끝내 듣지는 못했다. 할머니가 삼촌이 왜 안 오냐 물어볼 때마다 출장을 갔다고 둘러댔다. 할머니는 눈치를 챈 건지 어쩐 건지 집안 분위기만 살폈다. 12월 26일 삼촌 장례를 치렀다. 장례를 도와준 사람들을 초대해 밥을 먹이는데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내가 할머니에게 가장 큰 손녀딸이다. 할머니는 집에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물었다. 송별회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할머니는 그 후 삼촌에 대해 몇 번 더 묻고는 고기를 달라고 했다. 우리는 돼지고기를 사서 푹 삶아 할머니께 드렸다. 할머니는 돼지고기를 맛있게 한 끼 잘 드시고, 그날 이후 쌀알 한알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렇게 삼촌과 한 달이라는 시간차를 두고 목숨처럼 아끼던 외아들을 지키러 저승길을 스스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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