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속3. 나 같은 당신에게 건네는 100가지 이야기
경험 뒤에는 늘 깨달음이 이어졌습니다. 생각과 달리 같은 경험도 깨달음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그 대상이 인생이든 기술이든 모두 그랬습니다. 특히, 경험의 난이도가 높을수록 포도송이처럼 크고 작은 깨달음이 열매처럼 달렸고, 그 당도(糖度) 또한 갈수록 진하더군요.
"어때요? 당신은 지금 달콤한가요?“
깨달음은 담쟁이 넝쿨처럼 한 방향으로만 향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깨달음은 뿌듯함과 함께 미래에 대한 행복감을 선사했고, 어떤 깨달음은 깊은 후회와 함께 미래에 대한 불안감까지 갖게 했습니다. 지나고 보면 모두 삶의 처방전이 맞긴 했지만, 너무 아픈 깨달음은 삶의 갓 길로 내쳐진 것 같아서 아름답게 승화되기가 쉽지 않더군요.
"어때요? 당신은 어떤 깨달음이 더 많았나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뭐든 간에, 대부분의 깨달음은 또 다른 경험이 그 위에 양파껍질처럼 입혀졌습니다. 행복한 깨달음은 가능한 똑같은 경험을 입히고 싶은 마음에 안주하기 일쑤였지만 지속되지는 않았고, 회한(悔恨)의 깨달음은 더 이상의 경험을 주저하게 만들었지만 어느새 새로운 경험을 찾게 되더군요.
"어때요? 당신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나요?“
경험하고 깨닫고 또 경험하고 깨닫는 사이사이의 화룡점정은, '시간(세월)'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고명(Topping)이 얹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마다 무술고수처럼 '내공(內攻)'이 덤(Bonus)으로 쌓였습니다. 정말 부지불식간에 세월(Time)은 깨달음에 맛과 향을 내고, 공간(Space)이 더해지면 질과 양까지 강화시키더군요.
"어때요? 우리는 왜 깨달으면서 살아갈까요?“
전쟁 같은 깨달음과 토핑 같은 시간이 만나, 마침내 얻는 짜릿한 '내적 여유(餘裕)'는 아주 잠시였지만 맛은 알겠습니다. 깨달음에 좀 깊게 깨달음을 내달리면 '진정한 자유(眞理)'를 만난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만일 성인(聖人)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 것이라면, 나는 아직 다 큰 성인(成人)에 머물러 있더군요.
"어때요? 당신은 어디까지 깨닫고 싶으세요?“
P.S.
세상에 그 어떤 깨달음과 과학기술로도 아직까지 득하지 못한 '자유'는 생물학적 소멸(죽음)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서양철학의 다시 돌아오지 않는 자아의 상실과 동양철학의 윤회적인 새로운 세계로의 입적으로 받아들이며, 오늘도 새로운 경험과 깨달음을 기다립니다. 깨달음의 한계는 오직 죽음 뿐! 그래서 '삶은 무덤 주위에서의 향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