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기는 계단을 걸어 내려오면서 자신의 하루가 위협받는다고 느꼈다. 그러니까 그것은 실제로 위협을 받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그저 느끼고 있는 것이었고 누군가 실제로 위협을 가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계단에서 누군가 기다리다가 급작스럽게 등장해서 폭력을 가했다거나 무엇을 요구한 적도 없었다. 어떤 위협은 실제로 현현하게 일어나야 성립이 되지만 어떤 위협은 피부를 위축시키고 털을 세우는 데에 그것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일어나서 위협을 느낀 것도 위협받는 것이겠으나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 위협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느낌은 너무 생생해서 그는 그것의 실체를 의심하지 않았다. 위협을 실제로 맞닥뜨리게 된다면 오히려 그 위협은 거기에서 종료가 된다. 실체로 다가온 위협은 더 이상 위협이 아닌 위험이다. 상황이고 사건이 되는 것이다. 상황과 사건은 어떤 식으로든 처리된다. 하지만 실체가 없는 위협은 끝없이 그 자리에서 퀘퀘한 냄새를 가진 채 자리 잡는 것이다. 김선기는 잠바 주머니 안에 한손을 넣고 정권을 말아쥐고 있었다. 4층에서 걸어 내려오는 30초도 안되는 시간동안 그의 머리 안은 다섯 가지가 넘는 시나리오가 재생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리는 계단을 내려가는데 기능을 하겠지만 그의 머리는 온통 위협이라는 질문에 대한 답들을 해오며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시작은 별것 아닌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별것 아니라는 것은 아니고 어떻게 생각하냐에 따라 그것은 누군가에게 별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별것으로 그에게 작용하는 것은 그 누군가에 김선기가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별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조차도 고려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일은 김선기에겐 별것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담배를 피우러 4층 베란다에 나갔다가 3층의 입주자를 만난 것이다. 여느 때처럼 3층 입주자인 노년의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고 응당 돌아와야 할 답인사를 기다리던 때였다. 그 노인은 김선기의 바람과 달리 인사를 받지 않았다. 그리곤 대뜸 현금 있냐고 물었다. 그는 실제로 현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베란다에 담배를 피우러 나가며 현금을 가지고 나갈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우호적인 이웃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던 김선기는 웃으며 죄송한데, 현금은 요즘 쓰지 않는다며 간접적인 거절 방법으로 그 상황을 넘기려 했다. 네, 없습니다. 라던가 죄송한데 현금은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직접적으로 거절을 했을 때 이어지는 어색함이 반갑지 않은 것도 있었고 굳이 죄송한데 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까지 어쩌다 베란다에서 담배 피우다 마주치는 이웃에게 공연히 사과하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베란다에 담배를 피우러 나온 상황에서 현금이 없는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굳이 파고든다면 그것은 베란다에 담배를 피우러 나온 상황에서 마주친 이웃의 인사에 답하지 않고 되려 현금이 있냐고 물어본 노인이 죄송한데, 현금있냐고 묻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던 연유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노인은 죄송한데, 저 혹시 등의 단어를 붙이며 쭈뼛대기보단 그럼 카드는 없어? 하고 한걸음 더 그에게 다가왔다. 이 상황에서 그는 불쾌감을 느꼈다. 그 대답을 하기 전에 그는 짧은 순간에 빠르게 망설였다. 그 이유는 이 노인의 의중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현금 있냐고 묻는 상황이라면 카드보다 부가세 등의 세금 문제를 피하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했겠거니 지레짐작하고 후에 불쾌해했겠으나 베란다에서 만난 노인이 현금없냐고 물었을 때는 그 의중에 대해 전혀 데이터가 없다 보니 사유가 시작되지도 않아 불쾌감마저 찾아들지 않는 상황이었다. 또 그에게 카드는 있었다. 하지만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주머니엔 담배와 라이터밖에 없었지만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집 안에 카드가 있으니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수고를 하면서까지 노인에게 카드를 주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것이기에 카드는 없는 것과 같았다. 그럼에도 카드도 없습니다 라고 노인에게 말하는 것은 거짓말을 하기 싫어하는 그에겐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게 대답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하나 이상의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대답하기를 망설였던 것이었다. 카드가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일종의 거짓이 섞여 있는 것이고 그렇게 대답했을 경우 이 경우 없는 노인이 한번 더 요즘 세상에 카드도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라고 추궁한다면 추가로 거짓말을 하나 더 하거나 실제로 있긴 합니다만 하고 그가 처음의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 전에 그는 노인의 의중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대답 대신 질문을 선택했다. 혹시 뭐 때문에 그러신가요? 하고 김선기가 노인에게 물었을 때 노인은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이던 참이었다. 술 살려고. 소주. 이천원만 줘. 라고 노인이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을 때 이 갑작스런 대화의 의중은 충분히 파악되었으나 불쾌감과 당황스러움은 더 크게 찾아왔다. 평소 노인의 옷차림과 타고 다니는 차만 보아도 노후 빈곤에 시달린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그 상황에서 노인이 이천원을 원하는 것은 어딘가에 자본이 묶여 본인 뜻대로 융통되지 못함을 추측케 했다. 그러니까 이 노인의 부인 혹은 가족은 노인이 술을 사 마시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겠다. 정확히는 이천원이 문제가 아니니 돈으로 구매 가능한 어떤 종류의 알콜도 노인이 가까이하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이겠다라는 생각이 김선기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여기서 노인에게 술을 구매할 수 있는 자본을 제공하는 것은 노인의 가족구성원이 정해놓고 노인마저 따르고 있는 그 규칙을 베란다에서 담배 피우다 간혹 만나게 되는 4층의 남자가 멋대로 깨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김선기에겐 마음 켕기는 일이고 공연히 귀찮은 일을 만드는 일로 생각되었다. 선생님, 죄송한데 제가 현금이 없어서요. 지금은 담배밖에 없네요. 라고 사실에 기반한 거짓 없는 문장을 만들고 그 안에 도와줄 의사가 없음을 담아 노인에게 전한 김선기는 노인에게 몇 걸음 떨어져 남은 담배를 마저 피우고 얼른 집에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여전히 표정은 무언가를 갈구하고 시원하지 않은 표정이었고 그것이 그에게 술을 요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되자 그는 불안해졌다. 더 자세히 노인의 얼굴을 살피자 눈 밑과 코 옆 부분이 조금 벌개져 있었다. 이미 술을 어느 정도 마신 것으로 보였다. 노인은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한 채 말했다. 그럼 집에 가서 카드 가지고 오면 안되나. 일이 여기까지 벌어진 다음에는 김선기도 본인의 뜻을 더 명확히 비쳐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김선기는 모르는 사람에게 카드를 드리는게 좀 그렇네요. 하고 대답하려 했으나 혹여 노인이 우리가 어디 모르는 사인가? 이웃인데. 라고 충분히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라 빠르게 생각하고 죄송합니다. 타인에게 카드를 드리는 게 좀 그렇네요. 하고 고쳐 말했다. 그제야 노인은 크게 한숨을 푹 쉬곤 대답 없이 담배를 슬리퍼에 비벼끄곤 내려갔던 것이다.
그 이후로 김선기는 불안한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노인의 대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원하던 대답이 나오지 않았으니 그가 원하지 않는 대답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를 덮쳤다. 저 노인이 나에게 복수를 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 생각에 그의 하루는 불안으로 시작해 별일 없었다는 안도로 마무리되고 다시 아침이면 찾아오는 불안을 피할 수 없이 기다리고 있는 생활의 연속으로 변했다. 노인은 하루 중 대부분을 집에 있을 것이고 그는 집을 비우는 시간이 많았다. 그가 부재중일 때 노인의 앙심을 대응할 수 있는 계책을 아직 세우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김선기가 계단을 내려가며 말아쥐었던 정권은 노인에게 향할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어떤 불특정한 불안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정권의 방향은 술을 살 돈을 요구했던 노인이라기보다는 그의 외부, 그를 제외한 그 이외의 것 즉, 세상을 향한 것이 더 맞는 말이었다. 처음 며칠 동안 그는 사실 아무 의식도 하지 못했다. 어느 날 택배가 401호가 아닌 301호 앞에 있던 일. 현관문 앞에 모래가 가득했던 일. 집 앞의 택배 박스가 구겨지거나 조금 훼손되어 있던 일. 우편함에 들어간 401호 고지서가 뜯어져 있던 일. 주문했던 생수가 301호 앞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는 지금 일어나는 이 일련의 일들이 그날의 베란다에서 시작됐음으로 연관 짓는데 성공했다.
출근하여 본인의 책상에 앉은 뒤에야 아침에 베란다에 널어 둔 빨래가 생각이 났고 그것은 그의 하루를 흔들기에 충분한 이유였다. 두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넘길 수 있는 것이었고 하나는 아니었다. 첫 번째는 비가 올 수도 있다는 예감이었다. 예보와 다르게 하늘은 흐렸고 혹시 비가 온다면 베란다에 내놓은 빨래가 다 젖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넘길 수 있는 이유는 당장 그 의류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고 젖은 빨래를 다시 세탁하여 널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계속해서 괴롭히는 것은 예보와 관계없이 빨랫감을 베란다에 생각 없이 두었다는 그 사실 자체였다. 베란다는 자신에게 앙심을 품을 수도 있는 노인이 담배를 피러 갈 수도 있는 공간이었고 그 노인이 술에 취한 채 배회할 수도 있는 공간이었고 그 빨랫감에 무슨 짓을 할 수도 있는, 여러 가능성들이 산처럼 겹쳐있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노인이 그의 빨랫감에 담배를 비벼 끄던, 건조대를 넘어뜨리던 그것은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모두 사건이 일어난 결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다시 빨래를 하거나 손상된 의류들만 처리하면 해결 못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해결 못할 일은 그런 결과를 야기시킨 그 원인이었다. 그 노인이 그런 결과를 일으키고자 했을 그 동기. 그것을 마주하고 대응하고 처리할 자신이 그에겐 없었다. 결국 오전 내내 집중하지 못하다 창문을 넘어 빗줄기가 보이자 김선기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오후 반차를 급하게 신청했고 오전 내내 표정이 좋지 못한 것을 봐온 팀장이 별 추궁 없이 허락해 줬기에 집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4층의 베란다까지 단숨에 올라 숨을 몰아쉬기도 전에 401호 앞으로 옮겨진 건조대를 발견했을 때 그는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그 광경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불확실한 가능성 여러가지와 확실한 사실 하나였다. 누군가 베란다에 두었던 건조대를 직접 들어 실내로 옮겨 놓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옮겼을 지에 대한 가능성들이 그의 머리안에서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의 세탁물들이 비에 젖는 것을 우려한 누군가가 선의에 의해 문 앞으로 옮겨주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는 수건의 건조 정도를 확인하러 손을 가져다 댔다. 축축했다. 그 이유는 비를 맞았을 수도 있고 오전에 널어놓은 것이 아직 덜 말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은 오전동안 쨍쨍하지 않았던 외부의 탓일 수도 있었고 이미 어느 정도 비를 맞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출근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앙심을 품은 노인이 햇빛건조를 방해하기 위해 문 안에 들여놓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에도 충분한 물기였다.
그는 축축한 것들을 다시 세탁기에 넣고 빨래를 시작했다. 그새 언제 비가 왔냐는 듯 창에 햇빛이 비쳤다. 현관문 앞에 서서 베란다로 드나드는 사람이 있는지 귀를 기울였다. 세탁기가 작동종료를 알리는 기계음을 낼 때까지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건조대를 방 안에 볕이 잘 드는 곳으로 옮기고 빨래를 널기 시작했다. 건조대 앞에서 그는 다시 정권을 말아쥐었다.
김선기는 여전히 자신의 하루가 위협받고 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