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기
11/24 비행기 안에서
쿠알라룸푸르로 가는 당일 아침이 되어서도 당장 오늘 저녁조차 그려지지 않는 불확실함.
집 안에 있는 강아지만 만지작 거리며 나와의 짧은 이별을 견딜 수 있겠느냐 소리 내 물었다. 설이는 알 길이 없겠지. 나도 모르니까. 나에게 내가 어떤 확신이 있느냐고 그래서 지금 어딘가로 향하는 것이냐고 묻는 것을 피하는 방법으로 나는 설이만 쥐었다.
3개월, 더 길어질 수도 있다고 말하고 다니긴 했지만 잘 모른다.
입국 이후 짐 찾기, 유심 사기, 환전하기, 어플로 택시 잡기. 공항 근처에서 그랩은 안된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에어아시아 어플도 다운 받아 카드를 등록해두었다. 숙소는 한달 치를 잡아 두었다. 가장 뒤로 미루고 있는 일. 혹시 침대 위에 앉아 마주하는 것이 쾌가 아니면 어떡하지. 그래도 당당하기를. 김유정처럼 명일에 대한 희망이 끓기를.
돈을 잃는 것과는 다르게 내가 가져온 짐의 가치가 얼마이든 내 가방이 타인의 것과 바뀌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바뀌어서 더 좋아진다고 한들 원하지 않을 혼란. 돈은 삶의 혼란을 최소화 시켜주는 매체이고 정작 피하고 싶은 것은 그 혼란. 혼란의 끝에 내 신체에 위협이 되거나 혹은 위협이 될 지도 모를 상황에 처하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 특정 상황에 따라 가치가 변동되는 비상성.
수명에 대해서. 인간의 수명이라는 것은. 단지 햇수로 정해진게 아닌 통계적 수치일 뿐인데 몇 년을 살면 이만하면 많이 살았다 느낄 수 있을까. 삶이란 건 원하는 대로 받아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거북이는 몇백년을 사는데 나무는 더 오래도 살텐데 왜 인간은 백년 안팎의 수명을 가지고 태어난걸까 사람은 왜 늙는 걸까 왜 사는 걸까
11/25 쿠알라룸푸르의 첫날
혼자 쓸 줄 알았던 집이 셰어아파트여서, 생각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겨서,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고 싶지 않았어서 느꼈던 불쾌라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을텐데. 러시아 사람과 중동 사람이 있다는 집 주인의 안내를 들었지만 소리도 들을 수 없었으니 탓을 하기도 애매하다. 내가 그렇게 우려하던 첫날 과제를 완료한 뒤의 상태가 쾌가 아니어서. 결국 내가 느낀 불쾌감들은 모두 이 도시에 이방인으로, 아니 이 도시 때문이 아니다. 어디서도 느껴본 적이 없던 이방인이 된 기분때문이다.
군대에 있을 땐 타의에 의해, 그리고 나 같이 끌려온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 기분을 피해갔었구나. 부사관이나 장교로 갔다면 느꼈을지도. 누구도 가라고 말한 적 없고 가는게 좋다고 안내해 준 것도 아닌데 혼자서 결정하고 타국으로 왔다. 영어를 배워오겠다는 포부보단 거기서 뭔가 도피 비슷한 느낌을 내며 물가가 또 저렴하다 하니 구체적인 것은 아무것도 모르지만 얼굴엔 미소를 가득 띄우며 지낼 3개월을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 gym에 다녀오고 pool에도 다녀왔다. pool에 들어가자마자 피부로 닿는 것은 물이 아닌 외로움이다. 차갑다. 정말 차갑다. 여기엔 아무도 없다. 누구도 없다. 여기에 왜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끈질기게 물어본다. 여기서 뭐 하는거야. 빨랫감이 늘었다. 세제를 사와야 한다. 저녁엔 pool에 가지 않을 지도 모른다. 서점에 들러서 영어로 된 책을 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