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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규 Oct 07. 2023

 로마 대약탈(사코디 로마)

잔머리로 재앙을 초래한 클레멘스7세


클레맨스 7세와 로마 대약탈(사코디로마)     

  하드리아노 교황 사후 줄리오 메디치가 클레멘스 7세 교황으로 즉위했다. 그는 키가 훤칠하고 외모가 준수했으며 철학, 신학, 건축 등 모든 분야에 탁월한 식견이 있었다. 레오 10세 교황 시절에 2인자로서 교황청의 외교, 내정 등을 훌륭하게 소화해낸 실무경험도 있었다. 더욱이 예술과 학문에 호의적인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의 재등장에, 로마는 풍성하던 레오의 시대가 돌아왔다며 환호했다. 당시 학자이자 시인인 피에트로 벰보는 그가 “교회 역사상 최고이고 가장 지혜로운 통치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윌 듀런트, 문명이야기 5-2>. 

  실제로 그의 출발은 아주 훌륭했다. 자신의 연수입을 모두 추기경들에 나눠주었고, 학자들과 서기들에게 일자리를, 선물은 많지 않았지만 모든 계층에게 예의를 다해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어떤 교황도 이렇게 훌륭하게 시작한 적은 없었다<윌 듀런트, 전게서>. 

  그러나 클레멘스 7세가 처한 상황은 그렇게 녹녹치 않았다. 알프스 이북에서는 루터와 츠빙글리 등이 종교개혁을 외치고 있었고, 동쪽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기독교 세계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독일과 스페인, 네덜란드, 이탈리아 남부까지 장악한 군주(카를 5세)가 나타났다. 외가는 스페인 왕가이고 친가는 신성로마제국 황가였다. 카를 5세의 등장에 유럽의 군주들은 서유럽의 세력균형이 어떻게 될 지 불안했고, 영국 프랑스 등 대국은 엄청난 세력의 경쟁자가 나타난 데 대해 긴장하게 되었다. 특히 프랑스는 동쪽과 서쪽에서 카를 5세의 영토에 의해 포위된 느낌이었다.   

  한편 카를 5세는 독일의 군주여서 그런지 종교개혁에 관심이 많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세계공의회를 주장하고 있었다. 교황은 공의회를 가급적 피하고 싶었다. 공의회는 오늘날의 국회처럼 교황의 일에 사사건건 개입하고, 황제가 배후에서 조정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황제가 이탈리아 남쪽의 나폴리와 북부의 밀라노까지 자기 영향권에 두고 있어 교황령을 포위하고 있었다. 클레멘스 7세는 황제의 영향력을 견제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카를 5세와 프랑수와 1세의 경쟁교황의 부추김 

  최대 경쟁자인 프랑스의 프랑수아1세를 부추겨서 카를5세와 적대하게 만들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후보로서 카를 5세와 경쟁한 적도 있었고, 카를 5세에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지닌 유일한 군주였다. 교황은 이 두 세력을 싸우게 만들어야 자신의 운신 폭이 넓어지고 조정역할이 생긴다고 믿었다. 북한이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했듯이 양 초대강국의 조정자 역할을 하겠다는 듯이 계획을 추진했다. 비밀협약을 통해서 프랑스를 은밀히 지원하면서도 카를5세에게는 자신이 계속 황제편인 것처럼 행동했다. 교황으로서는 대단히 비열한 행위였지만 외교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라이벌 강대국은 가만히 놔둬도 싸울 가능성이 많았는데, 교황이 여기에 불을 붙였다. 이러한 결정은 대단히 위험하다. 두 강대국 중 자기편이 아닌 나라가 승리할 경우 그 폐해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조선왕조가 러시아를 편들다 망한 것처럼….

  프랑수아 1세는 4만의 대병력을 동원하여 황제파가 집권하고 있던 밀라노를 단숨에 함락시켰고 그 여세를 몰아 스페인 군이 지키고 있던 파비아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스페인군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의 공세를 석 달이나 막아냈고, 카를 5세는 실기하지 않고 명장 페스카라와 샤를 부르봉을 사령관으로 하는 증원군을 급파했다. 

  

  파비아 전투와 프랑스의 패배

  1525년 2월 24일 파비아 전투가 시작되었다. 객관적인 전력은 프랑스군이 우세해 보였다. 교황이 지원한 이탈리아 용병도 있었고 용맹을 자랑하는 스위스 병사도 있었다. 특히 프랑스군의 대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프랑스 군은 이라크 전쟁 때 미군이 공습을 먼저하고 지상군이 마무리하는 전술과 비슷하게, 대포를 비 오듯 쏴서 상대진영을 초토화 시킨 후 중장기병으로 공격했다. 평소 같으면 상대방은 그대로 무너졌을 텐데, 스페인군은 새로운 전술로 대응했다. 프랑스 군의 대포공격을 참호나 엄폐물로 견뎌낸 후 프랑스의 중갑기병이 돌격해 올 때, 창병의 엄호 속에서 화승총병이 나타나서 중갑기병을 공격했다. 원래 화승총은 화약을 장전하는 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렇게 위협적이지 못했지만, 스페인군은 3개의 열로 나누어 차례로 발사해서 연발사격의 효과를 거양했다. 그 결과  1만 5천명이 전사한 프랑스군이 대패하며 프랑수아 1세까지 포로로 잡혔다. 반면 스페인은 500명의 전사자를 냈다. 이 전투이후 이탈리아는 스페인의 지배하에 들어갔고 전쟁방식도 중장기병에서 보병위주로 전환되었다.      

  카를 5세는 포로로 사로잡힌 프랑수아 1세를 마드리드로 송치하였으나, 교황에 대해서는 응징할 여유가 없었다. 독일에서 벌어진 농민전쟁을 진압해야했고 헝가리를 공격하려는 오스만의 술레이만 대제도 상대해야 했는데, 프랑스는 프랑수아1세의 석방을 위해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코냑동맹과 카를5세의 반격

  한편 파비아전투 1년 후인 1526년 2월 9일 프랑수아 1세가 부르고뉴와 제노바를 카를 5세에게 넘겨주고, 밀라노를 포기하며 어린 아들 둘을 인질로 맡기면서 풀려났다. 교황은 기다렸다는 듯이 카를 5세를 견제하기 위한 반-합스부르크 방위동맹을 프랑스 코냑에서 체결하였다(코냑동맹1526.5.23.일). 교황청, 프랑스, 영국, 밀라노, 베네치아 등이 참가했다.

  그런데 너무 서둘렀다. 프랑스는 파비아 전투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당장은 전쟁을 수행하기 어려웠고, 영국도 카를 5세의 세력이 두려워 코냑동맹에 가담했지만 그 역할분담이 명확하지 않았다. 동맹군이 결성되었지만 피렌체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국가들의 병력뿐이었다. 

  한편 카를 5세는 자기가 임명한 밀라노 공작이 반란음모를 일으키자 밀라노를 공격하고 있었고, 밀라노는 스페인군의 공세를 힘겹게 버텨내고 있었다. 당시 동맹군은 3만5천명이나 되어 수적으로 우세했다. 신속하게 밀라노를 도왔다면 스페인군을 패퇴시킬 수 있었다. 중대한 실기를 한 것이다. 동맹군의 구성이 베네치아 피렌체 등으로 다양해 의견의 통일이 어려웠고, 베네치아군 사령관 우르비노 공작은 메디치 교황 레오10세에 의해 우르비노 공국에서 쫓겨난 적이 있어 클레멘스 7세에게 악감정이 있었다. 그런데도 클레멘스 7세는 대단히 우유부단해서 아무런 지침을 내려주지 않았다.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스페인은 파비아전투의 영웅 샤를 부르봉을 보내 밀라노를 함락시켰다(1526.7). 샤를 부르봉은 겨우 300명의 병력만 데려왔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카를 5세는 오스만투르크의 헝가리 공세(모하치 전투, 1526.8월)때문에 다른 곳에 병력을 배분할 여유가 없었다. 이런 호기를 동맹군은 잃어버렸다<시오노나나미, 나의친구 마키아벨리 P436>. 

  카를 5세는 당장 자신의 군대를 동원할 수 없어 교황과 사이가 나쁜 콜론나 가문을 부추겨 로마에 있는 교황을 공격하게 했다(1526년 9월). 다급해진 교황은 동맹군 병력을 포강 이남으로 옮기는 데 동의하는 등 동맹군의 항전의지를 꺾어버렸다. 카를 5세의 시간벌기 작전에 말려든 것이다. 이 상황을 지켜본 베네치아는 교황을 단념하고 베네치아군 사령관 우르비노공작에게 가급적 전투를 피하라는 비밀지령을 내렸고, 당시 동맹군 사령관이었던 구이차르디니는 “왔노라, 보았노라, 달아났노라” 라고 그의 ⌜이탈리아사⌟에 적었다<시오노나나미, 전게서P438>.      

  카를 5세의 독일용병과 이탈리아 공략

  카를 5세는 독일농민반란이 수습되고 오스만군도 헝가리에서 퇴각하자 이탈리아 공격을 개시했다. 1526.9월에 지난 3년간 교황의 비열한 행동을 조목조목 제시하는 선언문을 작성하게 했다<GE 영, 메디치가문 이야기 P356>. 그리고 란츠크네이트란 독일용병을 창설한 프룬츠베이크로 하여금 용병을 모집하게 했다. 프룬츠베르크는 카를 5세가 준 용병료가 많이 부족해서 아내의 보석 장신구와 개인 소유의 은식기까지 모조리 팔아 1만 2천명의 용병을 모집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약탈을 염두에 둔 전쟁을 의도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군대는 루터파 교도가 많아 교황을 응징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이들은 교황의 불신앙 때문에 온 유럽이 끈임 없이 전쟁을 치르고 있고 투르크에게 번번이 패배하며, 자신들도 가난해졌다고 믿고 있었다<GE 영, 전게서 P357>. 

  프룬츠베르크는 용병들을 이끌고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오는 브레너 고개를 넘어 만토바 근방으로 나아갔다. 여기서도 동맹군은 의견이 분열되었다. 밀라노의 스페인군과 연합하기 전에 이 독일용병들을 당장 공격하자는 조반니의 주장과 좀 더 기다려 보자는 베네치아안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도 교황은 명확한 지침을 주지 않았다. 11월 25일 조반니는 자기 병력만 이끌고 독일용병을 공격했다. 일부 성과를 거두었으나 본인이 부상을 당해 죽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교황군의 큰 손실만 초래했다. 이렇게 티격태격 하는 과정에서 독일용병과 밀라노의 스페인군이 합쳐지게 되었다. 카를황제는 밀라노에 있던 부르봉에게 총사령관직을 맡겼고 부르봉은 밀라노의 스페인군을 이끌고 포강을 건너 독일용병과 합류했다(1527.2월).      

  설상가상으로 이제까지 중립을 지키고 있던 페라라의 알폰소 공작이 황제군에게 식량과 대포를 제공했다. 겨울이라 약탈이 힘들었다. 황제군 입장에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대포는 로마 성벽을 공격하는데 요긴 할 터였다. 이제껏 교황이 페라라를 코냑동맹에 가입하라는 요청을 한 바가 없었으니 이에 대해서 할 말이 없었다. 2만 명이 넘는 거대한 군대는 3월 7일 볼로냐에 도착했으나 동맹군은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눈 덮인 들판에서 야영을 하는데 식량도 부족했다. 황제군 내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용병대장 프룬츠 베르크는 그 와중에서 중상을 입었고 독일로 실려 가서 사망했다. 부르봉은 겨우 목숨을 구했다. 

  이 상황에서 교황은 동맹군에 충돌을 피하라는 지령을 내리면서 강화교섭을 시작했다. 그러나 부르봉이 원하는 충분한 몸값(24만 두카트)을 구하지 못했다. 피렌체 사절이 급한 대로 8만 두카트를 들고 부르봉을 찾아갔으나 길이 어긋나고 말았다<시오노나나미 전게서 P450>.

  3월29일에 부르봉은 병사들의 성화에 못 이겨 로마행을 선언했다. 교황에게 자신은 부하들을 제제할 수 없으며 평화조약은 끝났다고 알렸다<윌 듀런트, 전개서 P391>. 병사들은 환호하며 중간에 피렌체를 들르지 않고 로마로 직행했다.      

  유명무실한 동맹군

  동맹군이 황제군을 따라가고 있었으나 40km나 거리를 두고 있었다. 교황이 명확한 지침을 주지 않았기 때문인지 이들은 황제군과 싸울 의지가 전혀 없었다. 베네치아군은 본국의 지령 때문인지 구경꾼처럼 따라가고 있었다. 용병대장 조반니의 죽음이 교황입장에서는 엄청난 손실이었다. 그가 살아 있었다면 무언가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 황제군의 움직임에 제동을 걸 수 있었을 텐데…. 동맹군은 볼로냐에서 로마 까지 1달이 넘는 황제군의 행군 동안 아무 제지 노력을 하지 않았다. 

  황제군이 5월4일에 로마의 성문 밑에 도착해서 5월 6일 새벽에 공격을 개시했다. 문제는 전투가 개시된 지 얼마 안 되어 앞장서던 총사령관 부르봉이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그럼에도 전투는 8시간 정도 지속된 후 정오쯤에 승패가 났다. 콘스탄티노폴은 불과 7천명의 방어군으로 16만의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53일을 버텼다. 그런데 9만 명의 시민이 살고 있었던 로마가 단 반나절의 전투로 함락된 것은 최고 지도자의 단호한 의지 부족으로 판단된다. 황제군을 뒤따라오던 동맹군도 기독교의 수도가 약탈되고 있는데도 수수방관하다가 철수 했다.


  교황의 도주와 로마약탈

  교황은 도망가기 바빴다. 147명의 스위스 근위대가 목숨을 잃으며 시간을 버는 동안 남은 42명의 호위 아래 바티칸을 버리고 산탄젤로 성으로 도망갔다. 로마시민들을 무방비 상태로 남겨둔 채로…. 

  사령관이 죽고 지휘계통이 무너진 군대는 폭도로 변했다. 황제군은 거리를 행진하면서 앞을 가로막는 사람은 모두 죽였다. 성베드로 대성당에 피난처를 찾은 사람들도 죽였다. 사제, 수도사, 주교 등도 죽임을 당했고, 라파엘로의 그림이 전시된 방들이 마구간이 되었다. 살아남으려면 몸값을 내야했다. 돈을 받아내기 위해 부모들 앞에서 아이들을 높은 창문에서 던지려 했다. 황제군의 절반은 독일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교황과 추기경이 도둑이고 로마 교회의 재산은 여러 나라에서 도둑질한 것이라고 믿었다. 교회의 성스러운 그릇과 예술품들은 끌어내어 녹이거나 팔았다. 몸값을 내지 못한 추기경들은 고문을 당했다. 수녀들과 귀부인들도 겁탈을 당하고 폭행을 당했다. 이런 상황이 6개월이나 지속되었다. 로마에 르네상스 시대 건물이 없는 것도 죄다 불타 버렸기 때문이다. 교황청의 죄악과 탐욕, 로마의 부정부패 등이 징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동정심을 일으키는 광경이었다.

  같은 기독교도에 의한 약탈이니 5,6세기에 훈족, 반달족, 고트족 등 야만족에 의한 로마파괴보다 더 처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에라스무스는 “ … 정말이지 이것은 한 도시의 파괴가 아니라 온 세상의 파괴입니다<윌듀런트 전게서>.” 라고 썼다.  

  6개월 동안 로마 인구는 9만에서 3만으로 줄어들었다. 살해된 자 2만, 도망친 자 2만, 페스트로 죽은 자 2만 이었다. 전염병이 점령군을 물러나게 했다. 독일 용병도 1만2천명에서 7천명으로 줄어들었다<시오노나나미, 나의친구 마키아벨리 P458>.      

  막을 수 있었던 재앙

  윈스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을 ‘불필요한 전쟁’이었다고 말했다. 로마 대약탈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재앙이었다. 클레멘스 7세는 교활함만 있었지 광명정대함이 부족했다. 하드리아누스 6세 교황은 군주들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했는데, 클레멘스 교황은 군주들간 적대감을 불어넣었다. 자신과 교황청만을 생각한 행위로 서유럽 전체의 안위는 고려하지 않았다. 

  둘째 그렇게 전쟁을 부추겨 놓고서 자신은 정작 전쟁이 두려워 평화협상에 매달렸다. 생즉사 사즉생의 이치나, 평화를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단호한 전쟁의지 부족으로 참화를 막을 여러 기회를 놓쳤다. 그 과정에서 동맹군 내부의 분열과 전투의욕을 꺾어버렸다. 교황은 평화를 원했지만 그 희망이 왠지 전쟁을 불러온 것만 같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상황을 “평화는 필요하다. 그러나 전쟁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클레멘스 7세는 평화와 전쟁 가운데 택일하는 것조차 힘겨워하고 있다.”고 설명했다<시오노나나미 전게서>. 지도자의 우유부단함이 빚은 참사였다.

  셋째 교황은 성직자로서의 존경심을 잃어버렸다. 카를 5세는 클레멘스 7세를 뻔뻔하고 교활한 정치인으로 봤을 뿐, 성직자로 보지 않은 것 같다. 진정한 성직자는 이 세상을 바보같이 사는 사람이 아닐까. 황제는 교황을 벌주고 약탈하기 위해 루터를 지지하는 독일용병들을 골랐고, 그들에게 돈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신의 징벌

  신은 세속적으로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한 클레멘스 7세를 사정없이 거꾸러뜨린 것 같다. 기독교의 최고지도자가 자신의 얄팍한 잔머리를 믿고 엄혹한 국제 정치에서 속임수로 일관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로마시민들과 로마의 파괴를 초래하면서…. 로마대약탈의 과정을 보면서 신의 섭리가 느껴진다. 머리 좋은 클레멘스 7세의 계획과는 모든 것이 거꾸로 갔다는 생각이 든다. 파비아전투에서 프랑스를 지원하다 실패했고 어설픈 코냑 동맹으로 카를 5세의 분노만 샀다. 평화협상을 원했으나 황제군의 지휘관인 프룬츠베르크와 부르봉이 차례로 무너져서 협상이 되지 않았다. 하필이면 독일용병들은 대부분 루터지지자로 로마를 ‘소돔과 고모라’로 생각했고, 처음부터 용병료가 적어 약탈을 기대하고 있었다. 황제군이 움직일 때 선제공격으로 이를 저지할 수 있었는데도 동맹군은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고, 유일하게 교황 편이었던 검은 밴드의 조반니 데 메디치의 이른 죽음으로 사실상 동맹군은 사라졌다. 평화협상도 길이 엇갈리는 등 결정적인 순간에 묘하게 일이 꼬였다. 로마대약탈은 소돔과 고모라 같이 신의 징벌처럼 느껴진다. 신은 클레멘스7세에게 지혜를 주지 않았고, 점령군에 대해서도 전염병을 통해 징벌을 내렸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는 과학의 문제

  로마대약탈은 지금의 정치지도자들에 대해서도 파당적인 잔머리보다 국가 전체를 생각하는 광명정대함을 보여야한다는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처리수 방류와 관련하여 정쟁이 끝이 없다. 그런데 지난 정부 시절 강경화, 정의용 전 외교부 장관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계획은 일본의 주권적 결정 사항”이며 “국제원자력기구(IAEA) 기준에 맞는 적합한 절차에 따른다면 굳이 반대할 건 없다”고 답변했다. 과학적 판단에 따르겠다는 말이었다. 지난정부 때  정부 합동 태스크포스(TF)가 발간한 ‘후쿠시마원전 오염수 관련 현황’ 보고서에도 “삼중수소는 생체에 축적되기 어렵고, 수산물 섭취 등으로 인한 유의미한 피폭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했고, “해류에 따라 확산·희석돼 국내 해역에의 유의미한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IAEA는 이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 계획에 관한 최종 보고서에서 “안전 기준과 일치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제적으로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판단을 믿고 있다. 해류가 가장 먼저 닿는 미국과 캐나다가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있다. 명시적으로 오염수 방류를 반대하는 국가는 북한과 중국, 러시아 정도다. 

  과학의 문제를 정치적 사안으로 비화해서는 안된다.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광우병도 결국 괴담으로 드러나지 않았는가. 정치인들이 일시적인 이해득실에 따라 행동하기보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광명정대한 결단을 해 주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그것이 국가를 위하고 자기들이 속한 정당을 위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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