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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규 Dec 14. 2023

페르디난트와 종교화해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

 페르디난트와 종교화해     

  세상사에 행운이 오면 그에 따른 재앙도 함께 온다고 불교에서는 말한다. 처남의 죽음으로 헝가리 왕관을 차지할 기회를 얻었고 경쟁자를 패배시켰으나 상대방은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페르디난트에게 패배한 야노시는 외세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자신의 왕국을 지키고 싶어 했다. 이교도인 오스만의 신하가 되는 조건으로 슐레이만 1세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헝가리 내부 분란에 따른 원조요청이니 오스만제국으로는 굴러온 호박이었다(不敢請固所願). 내부 사정을 잘 아는 자의 협력 요청이니 대단히 유익하다. 고구려의  멸망도 남건 남생 남산의 형제들 간의 다툼을 당나라가 이용한 것이었다. 슐레이만 대제는 때를 놓치지 않고 1529년 9월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오스트리아의 빈을 포위공격하기 시작했다. 페르디난트는 일생일대 최대의 위기에 몰렸다. 당시 유럽 사람들도 오스만군의 공격에 빈이 콘스탄티노플처럼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페르디난트는 급히 카를 5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카를 5세는 이탈리아를 놓고 프랑스와 대치중에 있어 소규모 병력밖에 지원할 수 없었다. 다행이라면 파비아 전투의 영웅이자 70세의 베테랑 장군인 니클라스 그리프 살름을 지휘관으로 발탁한 것이었다. 그는 요새와 누벽을 신설하고 두께가 6피트가 안 되는 성벽은 더 두텁게 쌓았으며 4개의 성문을 폐쇄하는 등 성벽을 견고하게 보강했다. 유비무환이랄까. 준비하는 자를 신은 도우는 지, 그해 봄과 여름에 유난히 비가 많이 와서 불가리아에는 홍수가 발생했다. 빈으로 진군하던 오스만군의 대포와 머스킷 등 화약무기를 상당부분 못 쓰게 되었고, 추운날씨에 낙타가 몰살하는 등 물자 수송도 힘들어졌다<위키백과, 1차 빈공성전>. 병사들도 보급 부족으로 굶주렸고, 전염병 등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그런 악조건 하에서도 슐레이만 1세는 공격을 밀어붙였다. 빈을 에워싸고 포격을 퍼붓었는데 견고한 성벽에 부딪혀 번번이 실패했다. 땅굴 공격도 합스부르크군의 반격과 장마에 무너졌고 설상가상으로 첫눈과 추위가 일찍 찾아왔다. 술탄은 많은 병사들을 잃고 포위 1개월 만에 퇴각했다. 패배를 몰랐던 슐레이만 1세도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는 빈 공방전 이후에도 슐레이만1세와 기나긴 전쟁을 계속해야했다. 오스만군은 재차 침공해 왔고 합스부르크 황가와 오스만 제국은 1533년에 코스탄티니예 조약을 체결하여 야노시의 헝가리 동부통치를 인정하며, 페르디난트는 헝가리 서부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페르디난트는 집요하게 헝가리 왕위를 노렸다. 1540년에 서포여이 야노시가 죽고, 그 아들인 서포여이 야노시 지그몬드가 야노시 2세로서 즉위하자, 1541년 아내의 왕권을 되찾기 위해 페르디난트는 다시 5만명의 군대를 일으켜 부다를 공격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슐레이만 1세의 역공에 이 공격은 사령관까지 전사하는 대실패로 끝났다<wikipedia>. 이 패배 이후 슐레이만 1세는 서부 헝가리에 대하여 페르디난트에게 세금을 내도록 압박하기까지 했다. 


  열악한 재정 상황

  페르디난트는 슐레이만 대제와의 전쟁에서 KO패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판정패를 당한 것 같다. 그 이유는 오스트리아의 재정 상황이 열악해서 대규모 병사를 동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수입으로는 5천 명의 용병을 2달밖에 고용할 수 없었다<Wikipedia>. 부족한 돈은 형의 원조와 푸거가 등으로부터 빌려야 했다. 한편 오스만제국은 합스부르크 제국 전체 세수입의 4배가 넘었다고 한다<마틴 레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힘든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다.

  헝가리 영토의 거의 70%를 잃고 전쟁으로 황폐해진 서부 지역만 확보했지만, 이것으로도 보헤미아나 오스트리아 지역보다 세수입이 많았다고 한다<wikipedia, Ferdinand I>. 페르디난트가 죽기 살기로 싸울 이유가 충분했고, 형처럼 많은 영토를 물려받지 못한 페르디난트로서는 한 뼘의 땅도 놓칠 수 없었다. 그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의 서쪽일부만 차지했지만 서유럽을 지키고, 후손들이 헝가리 전체를 되찾는 명분을 얻었다.      

  행정개혁의 성공

  페르디난트는 훌륭한 군사 전략가는 아니었지만, 행정조직의 개편에는 대단히 유능했다. 1527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대비하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로 흩어져 있는 그의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중앙집권적인 정부 행정개혁을 단행했다. 보헤미아와 헝가리에 왕의 부재 시 행정과 사법을 관장하는 최고위원회(섭정 평의회)와 외교· 사법· 재정 등 국정 전반에 걸친 정책을 조정하는 추밀원(자문위원회)을 설치했다<마틴 레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그리고 재정 확보를 위해 왕실재산관리청을 만들어 왕실 소유지 수입뿐 아니라 관세나 통행세 등 모든 세금을 일괄 관리하는 예산총계주의를 실시했다<네이버 지식백과>.     

  한편 1531년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병력과 무기, 교량·요새관리 등 국방관련 업무를 맡겼다. 1556년 황제가 되자 제국군사위원회로 확대 개편하여 오스만제국과 맞서 싸우는 동쪽 국경지역의 군대에 식량보급과 군사전략을 구상하는 역할을 하게했다<마틴 레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그리고 위원회의 제안에 따라 남쪽 아드리아 해에서 북쪽 트란실바니아 국경 지역에 걸쳐 100~120여 개의 요새로 된 초승달 모양의 촘촘한 방어망을 구축하기도 했다<네이버 지식백과>. 이러한 군사위원회 시스템은 1차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신 구교간 종교 평화 달성

  페르디난트는 슐레이만 1세와의 전쟁에서 항상 밀리는 상황이었기에 신교 제후들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들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오스만 군에 저항할 수 없어 제후들에게 루터파 종교를 버리라고 압박할 수 없었다. 신은 종교개혁이 가능하도록 오스만제국이라는 메기를 사용했는지 모른다.   형인 카를 5세는 보름스 회의에서 루터를 파문하고 1529년 제2차 슈파이어와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를 개최하여 종교문제를 논의했지만 일방적인 카톨릭 편향에 루터파 제후들이 1531년 슈말칼덴 동맹으로 결집했다. 이러한 제후들의 반항에도 카를 5세와 페르디난트는 이를 진압할 수 없었고, 오히려 독일내 신교의 자유를 잠정적으로 허용해야 했다. 1532년 슐레이만 대제가 30만의 대군으로 공격해 왔기 때문이다. 

  카를 5세는 프랑스-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이 일단락되고 루터가 죽자, 1546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독일의 루터파 제후들을 공격했다. 당시 신교측 슈말칼덴 동맹군은 상호간의 협력이 원활하지 않아 황제군에 각개격파 당했다. 1547년 뮐베르크 전투에서 황제군이 대승함으로써 루터파 제후들의 슈말칼덴 동맹은 궤멸되었다. 

  전쟁에 승리하자 카를 5세는 오만해져서 제후들과의 약속을 함부로 무시했다. 더 나아가 1531년 선거를 통해 차기 황제로 내정된 동생 페르디난트를 제치고 아들 펠리페 2세를 황제에 앉히려고 했다. 이러한 페르디난트의 토사구팽(兎死狗烹)에 독일의 카톨릭 제후들까지 반발했다. 황제에 대한 불만세력이 늘어나자 1551년 개신교 제후 등은 프랑스의 앙리2세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 제후들은 인스부르크에 있던 카를 5세를 기습 공격했고, 황제는 가까스로 도망을 쳤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페르디난트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1552년 8월 2일 파사우 조약과 3년 뒤인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제국 회의를 통해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 종교화의를 맺었다. '영주민은 영주의 종교를 따른다'는 원칙이 결정되어 신교를 믿는 제후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인정되었다. 카를5세는 이에 반대했으나 페르디난트는 선제후들과 합의하여 이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루터교측은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고, 향후 60년간 독일 내에서 종교평화가 왔다.     

  이교도인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에서 밀리며 부대끼고 있던 페르디난트에게 신구교의 다툼은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정적인 서포여이가 헝가리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교도인 오스만 제국의 봉신이 되고, 프랑스왕 프랑수와 1세가 합스부르크와의 전쟁을 위해 이교도인 오스만의 슐레이만 1세와 동맹을 맺는 상황이었다. 이들에게는 왕권을 지키는 것이 종교적인 믿음보다도 더 중요했다. 독일내 신교측 제후들도 자기들 권력을 지키는 방편으로 신교를 지지했는지 모른다. 이미 수도원의 재산을 몰수해서 사용해 버렸고 지역민들은 타락한 로마 카톨릭보다 개신교를 더 선호하고 있었다. 페르디난트는 전쟁이란 절박한 상황에서 군주들의 배교행위를 보며 종교에 대해서 형보다 훨씬 유연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더욱이 그가 다스린 지역은 강력한 귀족세력, 반대하는 의회, 개신교를 믿는 백성들이 혼재되어있어 통일적인 지배나 종교적 일치를 강제할 수 없었다. 그는 타협하며 조금씩 목표를 향해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마틴 레디,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로마 카톨릭을 지지하며, 예수회가 자기 영토내에서 활동하는 것을 허용했지만, 이러한 정책도 실용주의가 아닐까. 자신의 지지기반인 합스부르크가문이 로마 카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었으므로, 신교의 자유를 허용한데 대한 미안함에서 나온 균형정책으로 보인다. 형인 카를 5세는 종교통일을 이룩하려고 돌진하는 돈키호테였다면, 페르디난트는 종교통일이 거인이 아니라 풍차라고 꿰뚫어본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다. 종교 전쟁을 피하려고 돈키호테를 제지하는 산초판사의 역할을 했다고 봐야한다.      


  페르디난트는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며 끝까지 분투한 덕에 마지막에 승리한 2인자였다. 참고 인내하는 그 미덕에 신은 보답을 했다. 보헤미아 헝가리 등 중부유럽을 선물로 줬고 신성로마 제국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유럽을 방어한 공적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자리를 두고 형과 다툼이 생겼을 때 독일제후들이 그를 지지해준 명분이 되었다. 슐레이만 1세의 침입은 페르디난트에게는 위기이자 기회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인 오스트리아와 동유럽 영토는 카를 5세의 자손이 아닌 페르디난트의 자손에게 대대로 전해졌고 1918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까지 이어졌다.      

쉽게 물려받은 형보다 어렵게 쟁취한 덕분에 페르디난트의 제국이 오래 이어진 것 같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사라지듯 형의 제국은 일찍 대가 끊겼다. 성경에 끝까지 참고 견디는 자는 구원받는다고 했는데(마태복음 24장 13절), 끝까지 분투한 페르디난트는 구원을 받았나 보다. 정치는 혼란스럽고 경제는 아직도 겨울이다. 그래도 봄을 기다리며 참고 견뎌보자.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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