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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Dec 25. 2024

한국전쟁과 기독교⑨

제1장 한반도 서북 지역과 월남 기독교인 by 윤정란

1부 전쟁
제1장 한반도 서북 지역과 월남 기독교인     

4. 제국과의 전쟁(II)

1920년 이후에는 서북지역에서 새로운 지도자로 조만식이 부상했다. 이후 안창호와 조만식은 이 지역 정치·사회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조만식은 1920년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인회 개최 시에 임시회장으로 선출되면서 서북지역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안창호와 조만식이 주도한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의 정치적·사회적 활동은 1921년 평양 YMCA가 창립되면서 시작되었다. 서북지역 기독교인 대부분이 평양 YMCA의 구성원이었다. 국내외와 서북지역 전체를 주도한 인물은 안창호이며, 조만식은 국내에서만 그 역할을 담당했다.⁶⁹ 평양 YMCA를 구심점으로 한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물산장려운동, 청년 운동, 절제 운동, 농촌 운동 등을 전개했다. 이들은 각계계층으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 민족을 내세우며 협력과 연대를 주장했다.     

평양 YMCA

물산장려운동은 조만식의 주도로 전개되었다. 조만식을 중심으로 1920년 평양물산장려회가 처음 발기되었으나, 총독부의 방해와 일본인 상인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그 후 1922년에 다시 공식적으로 발족하고 활동을 전개했다. 평양물산장려회는 그 취지서에서 물산장려운동에 대해 민족경제 자립을 목표로 한 민간 차원의 보호무역 운동으로 규정했다. 만일 자신들이 지향했던 국민국가가 건설되었다면 서양에서와 같은 법령이나 정책을 통해 보호무역주의를 실시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니 공덕심과 공익심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같은 민족이기 때문에 이러한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1921년 한국인 사회단체 총 2989개 가운데 41%가 넘는 1236개가 서북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물산장려운동은 이러한 지역의 현실적 조건을 기반으로 두고 있었다.⁷⁰

평양물산장려회는 평양 YMCA 회관에 간판을 내걸었으나 가시적인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단지 매년 정월 초하루(설날)에 시가행진을 하며 물산장려를 선전하고 강연회를 개최하는 정도였다. 평양물산장려회는 자체적인 생산조합이나 소비조합 같은 실행기관을 두지 않았다. 서북 지역민들을 대상으로 교회의 각종 모임, 상공업자, 일반 사회단체를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내는 연대의 구심점으로서의 역할만 했다. 이러한 활동 노선 때문에 서북지역의 상공업계와 여성계에서는 스스로 이 운동의 전개에 앞장을 섰다.⁷¹    

 

1920년대 조선기독교여자절제회가 주도한 금주·구습타파 가두행진의 모습

이 운동은 일정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평양의 양말 공업과 고무 공업은 물산장려운동 기간에 지역경제에서 확실한 우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일본인 자본에 비해 정책적 지원이나 자본 규모 면에서는 열세였지만, 이 운동이 본격화되는 동안 기계 자동화를 통해 공장공업 단계로 진입했다. 이 지역의 양말 공업과 고무 공업의 경영자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⁷² 이 지역 상공인층은 교회의 인맥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자본을 축적해 나갔다. 평양물산장려회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금주단연동맹⁷³과 함께 생활개선, 절제 운동에 앞장섰다.   

   

청년 운동은 기독청년면려회¹를 통해 전개되었다. 이 단체는 삼일운동 직후 선교사 월리스 앤더슨(Wallace J. Anderson: 안대선)이 경상북도 안동장로교회에서 처음으로 조직했다. 그 후 1921년 장로회 총회에서 각 교회의 면려청년회 설립을 결정했다. 1924년에는 기독청년면려회 조선연합회가 창립되었다. 이 조직은 계속 확대되어 1934년에는 1067개 지회와 26개 지방 연합회를 갖추고 회원 수는 3만 1394명에 달하는 기독교 최대의 청년 단체가 되었다. 1928년에 이대위가 회장으로 선출된 뒤 이 단체의 주도권은 수양동우회가 장악했다. 수양동우회는 192 6년 안창호가 조직한 민족주의 단체다. 기관지 《진생》, 《면려회보》의 필진으로 수양동우회 인물 다수가 참여하면서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를 지면을 통해 선전했다. 또한, 기독청년면려회 중심으로 절제 운동, 물산장려운동, 농촌 운동을 전개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의 발단도 기독청년면려회의 활동에서 비롯되었다.⁷⁴     


농촌 운동은 1928년 장로회 총회에서 농촌부가 신설되면서 시작되었다. 농촌부장에 선임된 수양동우회 회원 정인과가 이 운동을 주도했다. 정인과는 농촌 운동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1933년부터는 기독교농촌연구회에서 이 운동을 주도했다. 이 연구회는 1926년 6월 정식으로 출범했는데, 주로 농촌 교회를 단위로 활동을 벌였다.⁷⁵ 1930년대에 들어서면 이 운동은 일제의 농촌진흥운동, 사회주의자들의 혁명 농민조합운동을 하면서, 소련을 자본가와 노동자가 없어지고 만민이 평등한 사회를 실현한 국가라고 한국인들에게 선전했다.⁷⁶ 이에 대항해 기독교인들은 덴마크를 예로 들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반기독교운동을 전개하자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에 대항해 농촌 운동을 전개하면서 덴마크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후반 다시 반기독교 운동이 전개되자 기독교계에서는 한국 기독교의 연합 조직인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규모로 농촌 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많은 기독교인은 가장 이상적인 기독교국가로 덴마크를 예로 들었다. 이미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에서는 정인과를 비롯한 대표단을 덴마크에 파견해 시찰을 마친 상태였다. 대표단들은 덴마크를 다녀온 후 이에 대해 보고를 하고 덴마크처럼 한국도 분명히 독립해서 번영된 민족국가를 수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한국 기독교인들이 이상적인 국가로서 덴마크를 내세운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통해 잘 엿볼 수 있다.⁷⁷ 한국에 와 있던 캐나다 선교사 아서 번스(Arthur C. Bunce)가 1934년 농민강습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이때 참석한 청년들이 “세계에서 가장 좋은 종교는 무엇이냐”라고 묻자 “인간과 사회제도를 개조할 수 있는 종교가 제일 좋은 종교이며, 만약 공산주의가 기독교보다 이 점에 더 잘할 수만 있다면 기독교는 물러나야 한다”라고 하면서 기독교를 통해 충분히 이상적인 인간 공동체를 만들어 낼 수 있는데 그 증거로서 “나는 덴마크의 경우를 들 수 있다”라고 말했다.⁷⁸ 한국기독교인들은 덴마크가 지상낙원이 된 것은 민족의 혼이 살아났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⁷⁹ 이처럼 당시 기독교인들은 농촌에서 사회주의자들과 일제에 농민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민족정신을 강조하면서 농민 운동을 전개했다.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의 정치·사회 운동은 철저한 청교도 윤리에 입각해 시민사회를 지향한 운동이었다. 물산장려운동, 절제 운동에 앞장섰던 조만식은 자본주의 소비문화의 무분별한 확산은 파멸밖에 없다고 주장했다.⁸⁰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각종 사회단체를 조직해 민족의 이름으로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를 실천해나갔다. 이는 자발성에 기초한 것이었다.    

  

조만식 선생

조만식의 주도로 전개된 물산장려운동에서도 그들은 단지 운동의 고리 역할 정도에 만족했다. 각종 상공인 단체, 사회단체에서 자발적으로 이 운동을 전개해나갈 수 있도록 토대를 만들어주었을 뿐이다. 이러한 운동은 시민사회의 기본 토대인 자발적 여론 형성에 기초한 것이었다. 안창호가 누차 강조한 것은 공론 형성이었다. 인격을 수양한 시민들의 공론 형성이 민권 시대의 상징, 공화정치, 민주정치의 핵심임을 강조했고, 공론 형성은 연설과 토론을 통해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19세기 말 전개된 독립협회에서 가장 중요시한 것이 공론 형성이었다. 토론과 연설은 각 교회, 학교, 각종 사회단체 등에서 훈련되어온 것이었다. 안창호는 인격을 지닌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이나 어떤 단체에 절대로 맹종해서는 안 되며, 자신들이 주체적으로 성찰해 내린 결론을 주장해야 한다고 했다. 이렇듯 각 시민이 모여 토론과 연설을 통해 공론을 형성할 수 있는 사회가 자신들이 진정으로 지향하는 것이라고 보았다.⁸¹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의 지속적인 정치· 운동에 대해 일제 당국은 언제든 기회만 되면 탄압하려고 했다. 일제 말기 총전시체제가 되면서 일제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조직한 민족주의 단체를 해산하고, 이에 가담한 많은 기독교인을 체포했다. 특히 1937년에 안창호가 만든 수양동우회를 탄압함으로써 합법적인 한국인의 정치·사회 단체는 국내에서 더는 존재할 수 없게 했다. 이어 일제는 그동안 민족운동의 토대이자 인적 관계망의 거점이던 교회와 기독교 학교에서 신사 참배를 강요함으로써 서북지역에서 전개된 모든 민족적 정치·사회 운동의 기본 토대를 붕괴시키고자 했다. 이러한 정책에는 한국 기독교인들과 일반 대중을 분리함과 동시에 미국과의 관계도 단절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⁸² 이 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일제의 정책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커다란 고민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신사 참배를 찬성할 경우 이러한 기본 토대는 유지할 수 있겠지만 민족의 연대와 협력을 강조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며, 신사 참배를 반대할 경우에는 기본 토대가 완전히 붕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 기독교인은 신사 참배를 지지함으로써 교회와 학교를 유지하고자 했지만, 많은 기독교인은 신사 참배를 반대함으로써 민족의 협력과 연대를 선택했다. 이에 200여 교회가 폐쇄되었고 2000여 신자가 투옥되었으며, 50여 명의 교직자가 순교했다.⁸³     


일제의 강요로 일제 말기에 부일 협력을 한 기독교 민족주의자들도 있었지만 적지 않은 기독교인이 순교하고 박해를 견디며 일제의 종교 정책에 저항했기 때문에, 광복이 되자 서북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기초한 국가 건설을 위해 각 지역에서 펼쳐진 자치적 시민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다. 따라서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이들의 정치·사회 운동은 광복 이후 서북지역의 자치적 시민 활동의 핵심적 토대가 되었다, 


[옮긴이 註]

1) 면려(勉勵): 남을 고무하여 힘쓰게 함. 기독청년면려회(基督靑年勉勵會, Young People's Society of Christian Endeavour)는 1881년에 프랜시스 에드워드 클락이 메인주 포틀랜드에 창립한 초교파적 복음주의협의회이다. 소속 회원들의 진정한 기독교적 삶을 증진시키고, 상호 교제를 증진시키고,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기 위한 신앙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조선기독청년면려회 소개 글) http://www.kich.org/news/articleView.html?idxno=10385     


[필자 註]

69) 장규식, 『일제하 한국기독교민족주의연구』, 140~141쪽.


70) 같은 책, 258~282쪽.


71) 같은 책, 263~265쪽.


72) 같은 책, 266~268쪽. 양말 공업에서는 이진순의 공신양말, 손창윤의 삼공양말, 방윤의 대원양말, 오경숙의 대성직조소, 박태홍의 세창양말, 이창연의 대동양말, 이용석의 영신양말, 박인관의 신성양말 등을 들 수 있으며, 고무공업에서는 정창고무, 대동고무, 평안고무, 서경고무 등을 들 수 있다.      


73) 같은 책, 274~275쪽. 금주단연동맹은 1927년 3월 평양 YMCA 임원 김봉준 등 북감리회 남산현교회 청년을 중심으로 창립되었다. 이 단체에서는 ≪절제생활≫이라는 기관잡지도 발행하면서 운동을 전개했다. 공동 저축 운동과 함께 1930년부터 가두선전에 나섰다.  

    

74) 같은 책, 149~150쪽     


75) 한규무, 『일제하 한국기독교 농촌운동: 1925~1937』(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7), 71~81쪽 참조.     

76) 「나순조이외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34년 3월 10일.  

   

77) 한규무, 『일제하 한국기독교 농촌운동』, 49~55쪽. 

    

78) 전택부, 『한국에큐미칼운동사』(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79), 138~139쪽.  

   

79 김활란, 『정말(丁末』인의 경제부흥론(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 1931), 8쪽.     

80) 장규식, 『일제하 한국기독교민족주의연구』, 288쪽.     


81 같은 책, 245~246쪽.     


82) 김상태, 「평안도 기독교 세력과 친미엘리트의 형성」, 192쪽. 

    

83) 김양선, 『한국기독교해방십년사』(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종교교육부, 1956),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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