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을 맞이한 많은 기독교인은 신사를 소각함으로써 일제의 정책에 얼마나 분노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신사 소각은 서북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8월 15일 평양을 시작으로 8월 23일까지 소각된 신사의 수가 전국적으로 136개에 이르렀다.⁸⁴ 그리고 해방이 되면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신속하게 교회를 복구하기 시작했고,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정책으로 교회를 떠났던 많은 기독교인이 교회로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기독교인의 신자 수가 급증했다.
이러한 기독교의 기반을 토대로 각 지역에서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자치 기구가 만들어졌다. 특히 서북지역에서는 이러한 활동을 주도하던 인물 대다수가 유력한 기독교 지도자였다. 평양에서는 조만식에 의한 평남건국준비위원회, 평안북도에서는 장로 이유필에 의한 평북자치위원회, 황해도에서는 목사 김응순에 의한 황해도건국준비위원회 등이 조직되었다.⁸⁵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 자치 기구가 조직·운영되는 가운데 소련군이 평양에 입성했으며, 이어 김일성이 따라 들어왔다. 소련군 사령부는 조만식이 주도하던 건국준비위원회를 해체시키고, 공산주의자와 비공산주의자가 반반씩 참가하는 인민정치위원회를 구성했다. 인민(정치)위원회는 다른 지역에서도 계속 조직되었다.⁸⁶ 소련군 사령부는 1945년 10월 8일에서 9일까지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대표자협의회’를 소집하고, 연락 기구로 5도행정위원회를 조직했다. 위원장은 조만식으로 선정되었다.⁸⁷ 이 협의회에 참석한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군 사령부의 지원 아래 10월 10일 ‘조선공산당 서북5도당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를 개최하고,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조직했다.⁸⁸ 김일성이 등장한 것은 10월 14일 ‘평양시 군중대회’를 통해서였다. 소련군 사령부는 김일성을 훌륭한 인물로 소개했다. ⁸⁹ 이어 11월에는 조만식을 수반으로 한 북조선5도행정국을 발족했다.⁹⁰ 소련군 사령부는 조만식을 정치 지도자로 인정하기는 했으나, 자신들의 의도대로 북한 정권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소련 사령부는 이러한 정책의 전개 과정에서 기독교인을 정치에서 점차 배제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배제에 집단적으로 가장 먼저 반기를 든 곳은 평안도였다. 평안도에서는 소련군 사령부와 공산주의자들에게 맞서기 위해 기독교 정당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1945년 9월 초 평안북도 신의주에서는 미국에서 유학한 목사 윤하영과 한경직이 기독교사회민주당(이후 사회민주당)을 조직했다. 이어 11월 3일에는 평양에서 조만식을 중심으로 조선민주당이 조직되었다. 이와 비슷한 시기인 11월 초 장로교 목사들인 김화식, 이유택, 김관주, 황봉찬, 우경천 등이 기독교자유당 결성을 논의했다. 기독교자유당은 1947년에 다시 결성하려 했으나, 북한 정권에 발각당해 더는 지전이 없었다.⁹¹
기독교인들은 점차 공산주의자들과 물리적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1945년 11월 평안북도 용암포에서 집단적인 첫 충돌이 일어났고, 이는 신의주 학생 시위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에서는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김일성을 급파해 사건의 중심에 사회민주당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간부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⁹² 이러한 상황에서 평안북도 6노회 교역자 퇴수회¹는 소련군과 공산주의자들에게 맞서기 위해 북한 지역의 모든 노회를 망라해 이북5도연합노회를 조직했다.⁹³
신의주 학생 시위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한경직과 윤하영은 검거를 피해 10월에 월남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의 탈출이 시작되었다.⁹⁴ 신의주 학생 시위 사건에 이어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즉각 독립이 아니라 신탁 결정이 내려지자 조만식을 중심으로 기독교인들은 이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했다. 1946년 1월 조만식은 체포되어 연금되었고, 김일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최용건이 조선민주당 당수가 되었다. 최용건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은 조만식을 이승만, 김구와 함께 조선 민족의 반역자로 몰았다. 조만식에 대해서는 그의 아들이 자진해 지원병 지원서를 쓴 데 대해 그가 매우 기뻐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며, 1943년 ≪매일신보≫에 “학도에게 바란다”라는 기사를 실은 것을 내세워 친일 반역자라고 혹평하면서 반동분자로 규정했다.⁹⁵ 이에 따라 기독교인들의 저항이 계속되었다.
소련군 사령부와 김일성은 1946년 3월 토지개혁을 단행함으로써 단 한 달 만에 지주제를 완전히 해체했다.⁹⁶ 이로써 기독교인들은 경제적 기반을 완전히 상실했다. 소련군 사령부와 김일성에 반대하던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체포 혹은 행방불명되거나 검거를 피해 월남했다.
[옮긴이 註]
1) 평북6노회( 평동, 평북, 용천, 의산, 산서, 삼산) 교역자 퇴수회(退修會)는 200여 명 참석한 회의 석상에서 박형룡 목사는 교회 재건의 기본원칙을 발표하였다. 이때 홍택기 등이 강력히 반발했다. 그는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 생활을 했거나 은퇴 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 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