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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양훈 Dec 30. 2024

한국전쟁과 기독교⑪

제1장 한반도 서북 지역과 월남 기독교인 by 윤정란

1부 전쟁
제1장 한반도 서북 지역과 월남 기독교인     

6. 맺음말

이 장에서는 한반도 서북지역의 역사적 정체성과 함께 1945년 광복 이후 이 지역민들이 남한에서 결집하는 과정에 대해 살펴보았다.      


한반도의 서북지역은 단군과 기자의 땅으로서 오랫동안 한민족의 발상지와 문명화의 전초기지로 인식되어왔음에도 오랫동안 정치적·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특수성으로 말미암아 신흥 상공인층이 일찍부터 출현했고, 이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기독교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이 지역 사람들은 기독교와 이를 통한 문명개화사상을 선점함으로써 19세기 말 이후 한반도의 주류 세력으로 성장했는데, 이를 선도한 지역이 평안도다.      

상하이 망명 당시의 신채호, 신석우, 예관 신규식 선생

그들은 자신들의 생존권과 재산권을 위협하는 조선의 신분제를 거부하고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새로운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정치·사회 활동에 나섰는데, 그 첫 활동의 무대가 독립협회였다. 이후 황제가 독립협회를 해산한 뒤 1905년 을사늑약으로 황제권이 약화하자 애국 계몽운동을 전국적으로 주도하면서 활동을 전개해갔다. 1908년 신채호의 “독사신론”¹을 통해 서북 지역민들은 지역사를 민족사로 외연을 확장해 조선 왕실의 역사를 완전히 부정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즉, 군주가 아닌 서북 지역민들이 역사의 주체로 떠오른 것이다. 기독교를 선점한 서북 지역민들은 자신의 지역이 서양 근대 문명의 전초기지이자 한민족의 발상지라는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민족의 지도자라는 선민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황제가 권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일제가 그 자리를 차지하자, 서북지역의 사람들은 일제와의 경쟁에 돌입했다. 황제가 자신들의 생명권과 재산권을 위협하자 황제권에 도전했던 그들이, 한일 강제병합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위협받자 일제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서북지역의 기독교인들은 1910년대에 외교를 통해 일제를 압박하려고 했다. 그러나 1919년 삼일운동을 통해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한국인의 모습을 보면서 전략을 수정했다. 삼일운동은 공화정을 표방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삼일운동을 보며 자신감을 얻었고, 수많은 한국인을 자신들의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일제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의 식민 정책에 수많은 한국인이 동의해야만 통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1920년대 이후 서북지역의 기독교인들과 일제는 수많은 한국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경쟁 관계에 돌입했다. 서북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이를 위해 인격주의와 민족을 내세워 일제의 정책에 반대하면서 수많은 한국인을 포섭해나갔다. 각 개인이 스스로 깨달아야만 그 지지가 영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 서북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자발적인 공론 형성을 가장 중시했다.     


그들은 자산가층, 농민층 등 각계각층을 자신들의 기반으로 삼기 위해 물산장려운동, 절제 운동, 청년운동, 농민운동을 전개했다. 1930년에 들어서면서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농촌이라는 공간을 두고 일제 및 사회주의자들과 경쟁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사업이 이미 소련에서 모두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반드시 달성할 수 있다고 농민들을 설득했다. 이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민족의 혼을 가진 덴마크를 예로 들면서 민족정신을 강조했다. 즉, 각계각층이 민족정신으로 근대화에 매진한다면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농민들을 설득한 것이다.     


서북 지역민들의 정치·사회 활동을 주도하던 수양동우회가 1937년 일제의 탄압으로 더는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기독교인들의 활동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신사 참배를 강요해 서북 지역민들을 분열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서북지역의 일부 기독교 지도자가 부일 협력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많은 기독교인이 신사 참배를 거부한 덕에, 광복 후 서북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기초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각 지역에서 펼쳐진 자치적 시민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다. 또한, 19세기 말부터 진행해온 이들의 정치·사회 활동은 서북지역에서 전개된 자치적 시민 활동의 핵심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 국내로 들어온 소군정과 김일성 연합 정권의 탄압을 받게 된 서북지역의 기독교인들은 월남을 감행해야 했다. 서북지역의 기독교 지도자 대부분이 공산당에 체포·구속되거나 죽임을 당했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 월남한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피난민 교회특히 한경직의 영락교회를 거점으로 삼아 월남한 목사를 중심으로 강한 연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옮긴이 註]

1) 《독사신론》(讀史新論)은 항일독립운동가·사학자·언론인인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가 1908년(융희 2) 8월 27일부터 자신이 주필로 있던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연재한 국한문체 논설이다. 같은 해 9월 15일까지 1차분이 연재되고, 10월 29일부터 12월 13일까지 2차분이 연재되어 총 50회까지 발표되었다. 12월 13일 자 연재 끝부분에 '미완'이라는 글이 덧붙어 있어 미완성 글임을 알 수 있다.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효시로 평가받는 글로, 당시 일제의 영향을 받아 조선 사학계에 등장하기 시작한 단군부정론(檀君否定論)과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불식하고, 한국 민족의 역사적 정통성을 일깨울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특히 신채호는 이 논설에서 기자(箕子)·위만(衛滿)으로 이어지는 기존의 역사 인식 체계를 거부하고 단군에서 부여·고구려로 계승되는 고대사 인식 체계를 제시하였다. 즉 한국 민족은 부여족·선비족·지나족·말갈족·여진족·토족 등 여섯 종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가운데 단군 자손인 부여족이 다른 다섯 종족을 정복하고 흡수함으로써 동국(東國) 역사의 주류가 되었다고 보았다.     


이로써 한민족이 단군의 후예이며, 부여족이 중심 종족임을 밝히고, 기자를 정통에서 몰아내는 실마리를 제공하였다. 또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 같은 민족인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부여족 쇠퇴의 결정적 원인으로 지적함으로써 신라의 삼국통일을 민족적 시각에서 비판하였다. 당시의 상황에서는 처음으로 왕조 중심에서 벗어나 민족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한 진보적인 글로 평가받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1945년9월 평양의 소련군정 행사장에 참석한 조만식(오른쪽)과 치스차코프, 로마넹코, 레베데프등 소련 장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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