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iO FT3
레퍼런스 헤드폰은 왜곡이나 흔들림이 없는 정확한 사운드를 목표로 하기 때문에 주로 모니터링 용도로 사용된다. 예전에야 이 모니터링이라는 작업이 소수 전문가들의 영역이었지만 이제는 유튜브나 개인 인터넷 방송 등으로 대중의 영역이 되었고, 그만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레퍼런스 헤드폰의 절대 강자는 누가 뭐라해도 젠하이저의 HD600이다. 과거 20년전에는 레퍼런스 헤드폰 3대장이라고 해서 Sennheiser의 HD600, AKG의 K701, BeyerDynamic DT880이 강력한 존재감을 뽐냈었는데, 나머지 둘은 생사가 불문명한 상황이 됐다.
사실 레퍼런스 사운드라는게 유행을 타는 것도 아니고 브랜드별로 개성이 아주 강한 것도 아니고(강할 필요도 없고) 주된 소비층인 전문가들은 어지간하면 익숙한 장비를 계속 쓰는 걸 선호하는터라 저 3대장의 빈자리를 메꿀 제품이 굳이 등장하지 않았던 것도 있다. 그래서 1997년에 출시된 HD600이 아직도 추앙받고 있는 것이다. 물론 HD600은 전설적인 제품이 맞고, 이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데 적극 동의한다.
FiiO의 FT3는 2023년 출시된 레퍼런스 헤드폰으로, 권위있는 일본의 음향 어워드 VGP 2023 금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HD600 입장에서야 그 동안 수 많은 자칭 라이벌이 등장했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으므로 '누구? 그런거 몰라 나는' 라는 입장이었겠지만 이 제품을 실제로 써보니 HD600 뿐만 아니라 과거 레퍼런스 헤드폰 3대장의 장점만을 취해 완성시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성능이 뛰어났다. 게다가 가격도 368,000원으로 꽤나 저렴하다. 심지어 이 가격은 20년 전 레퍼런스 3대장의 금액보다도 낮은 것이다. 물가 상승률을 반영한다면 이게 말이 되나 싶다.
그러고 보면 젠하이저와 베이어 다이내믹은 독일, AKG는 오스트리아이기 때문에 모두 유럽 출신이다. FiiO는 모바일 하이파이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모를 수가 없는 중국 브랜드다. 과연 FT3는 HD600의 점유율을 얼마나 빼앗을 수 있을지, 직접 구매하여 사용하고 있는 한 명의 유저로서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제품이 레퍼런스 제품이기 때문에 갖는 여러가지 특성들이 있다. 가장 큰 특징은 당연히 사운드로, 해상도가 높으며 정확하고 꾸밈없는 날것의 표현을 해준다. 음감용 헤드폰처럼 소리가 부드럽고 따뜻하게 다듬어져있지 않기 때문에 오래 청취시 귀가 피곤하게 느껴질 수 있으며, 잔향이 거의 없기 때문에 촉촉하고 찰랑찰랑한 느낌보다는 딱딱하고 차가운 느낌을 준다.
앞서 설명한 레퍼런스 3대장 제품에 비교했을 때 해상력이 월등히 높다. 사실 비교 대상들이 최소 20살 이상의 늙은이(!?)들이라 당연히 더 좋아야 맞지 않나 싶긴 하다. 또 재생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음역대부터 가장 높은 음역대까지 재생할 수 있는 실질 음역폭도 FT3가 가장 넓다. 레퍼런스 헤드폰이 가져야 할 첫번째 덕목이 음질이라면 FT3는 역대 나온 레퍼런스 헤드폰 중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저/중/고음의 배분도 적절하게 잘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저음과 고음, 각각의 음상이 맺히는 물리적인 위치가 확실히 구분되어 있어 공간을 여유롭게 쓰고 각 악기의 분리도도 두드러진다는 장점도 있다. 보통 레퍼런스 헤드폰들이 소리 자체에 집중하느라 공간 표현에서는 소홀한데 FT3는 소리는 물론 공간적인 점수 또한 높다.
이 점수는 당연히 '헤드폰 앰프' 연결을 가정한 것이다. FT3는 HD600과 동일하게 300Ω이라는 아주 높은 임피던스 수치를 갖고 있다. 이 제품은 일반인 용도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제반 지식과 관련 장비를 보유하고 있다는 걸 전제로 해서 만들어진 제품이다. 이 헤드폰의 제대로 된 구동을 위해서는 헤드폰 앰프가 반드시 필요하며, 성능이 낮은 헤드폰앰프를 사용하게 되면 사운드의 균형이 무너져 좋은 평가를 할 수 없게 된다.
최근 부쩍 늘어난 '휴대성을 강조한 DAC/AMP' 로는 이 제품의 사운드를 원활하게 재생할 수 없다. 콘센트 전원을 직접 받는 거치형 앰프를 사용하길 권장한다. 거치형 앰프를 권장하는데다 다양한 상황에서의 모니터링을 위해 FT3의 케이블 길이는 3m로 여유롭게 제공된다.
FT3를 조금 더 음악적으로 변모시킬 수는 있다. 이어패드를 교체하는 것이다. 좌측에 있는 것이 하이브리드 타입, 우측에 있는 것이 벨벳 타입으로, 음질이 우선이라면 하이브리드 타입을, 음악성이 우선이라면 벨벳 타입을 사용하는 것을 추천한다. (둘 다 기본 제공)
벨벳 타입의 이어패드를 사용하면 소리가 어두워지고 차분해지며 부드러워진다. 원래 피오가 진득한 음악성을 추구하는 브랜드가 아니고, FT3의 목적도 분명히 레퍼런스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벨벳 타입의 이어패드를 사용했다 하더라도 빼어난 음감머신이 되지는 않는다.
보통 이 금액대의 헤드폰들은 이어패드 옵션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피오의 대인배스러움을 알 수 있다. 이 제품 개발팀에서는 분명 타도 HD600! 라고 써진 머리띠를 두르고 있을것이기 때문에 이런거 하나라도 더 챙겨줘야 한다. 근데 솔직히 말하자면 아주 높은 확률로 하이브리드 타입만을 쓰게 될 것이다.
피오는 명실상부 2020년대를 이끌어가는 모바일 하이파이 브랜드다. 활발하게 신제품을 내놓으면서도 이어폰 / 헤드폰 / DAC / AMP / 이어팁 / 케이블 등의 다양한 제품군을 다루고 있는 큰 덩치도 갖고 있다. 2023년을 맞아 '기준'의 의미를 갖는 레퍼런스 헤드폰들의 '기준'을 제시한 것이 FT3이다. 제대로 된 모니터링 헤드폰을 찾고 있다면 HD600 말고도 훌륭한 선택지가 생겼으니 고민 좀 더 해보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