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찐을 만날 수 있을 거야
고양이만큼 소리에 민감한 동물도 없다. 꿀잠 모드에 있다가도 부스럭대는 소리에 번뜩 일어나기도 하고, 밥을 먹다가도 콩알 굴러가는 소리에 달려 나가기도 한다. 고요한 공간에 함께 있다가 쫑긋 대는 고양이의 몸짓을 보고 있노라면 나만 못 보는 허깨비를 본 건 아닐까 모골이 송연해지기까지 한다. 이 정도는 아닐지라도 우리가 고양이의 반의반 정도만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아이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생각을 나누고 듣는 건 필수 불가결한 일이다. 여러 생각들은 수업을 활력 있고 재미있게 만들며 글쓰기의 훌륭한 자원을 만들어낸다. 한편, 이런 많은 생각들은 때때로 상대를 피로하게도 만드는데, 다양한 생각들이 피로해서라기보단 말하고 듣는 자세가 바르지 못해서이다.
"OO이 생각 잘 들었어. 이런 생각을 하다니 훌륭하다. 그런데, OO아, 친구 이야기도 잘 귀 기울여주면 더 좋을 것 같아."
수업하며 여러 번 반복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아이의 대답은,
"학교 선생님은 제가 발표 잘한다고 좋아해요. 엄마가 발표 많이 하고 오라고 늘 얘기했어요."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목소리는 내고 살아야 할 것만 같다. 그렇지 않으면 내 자리는 위태위태하다가 결국 사라질 것 같기 때문이다. 여전히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라고 세상이 부추기는 것만 같다. 그런 가운데 돋보이는 이가 있으니, 조용히 친구 이야기를 듣고 맞장구를 쳐주는 아이이다. 이런 아이는 자기가 발표를 못 했다고 실망하지도, 주눅 들지도 않는다. 그리고 조용히 글로 생각을 풀어나간다.
어른의 세계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유독 자기의 목소리를 크게 내는 이가 있는데, 이런 사람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진이 다 빠져버린다. 때때로 그가 가엾게 느껴질 때도 있다. 외로워서 혹은 이 모임의 주인공은 나여야 하니까 소리를 높였던 걸까? 그냥 말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뭐가 됐든 남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자기 소리만 높이는 이는 자기중심적인 사고로 세상을 살아갈 확률이 높다. 과잉 자의식을 지닌 자로, 주제가 내 위주로 흘러가야 안정되고 자존감을 얻는 사람. 자아가 단단하지 못해 외부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사람. 종종 모임에서 만나는 이런 이들이 나는 참으로 안쓰럽다.
'말하는 것만큼 듣는 것도 중요한데. 들어야 진짜 대화가 시작될 텐데. 진정 내 마음을 들어주는 찐을 만날 수 있을 텐데.'
가을이 오는 풍경에 눈보다 귀가 먼저 반응하게 된 건 지방의 작은 도시로 이사를 오고부터다. 고운 빛으로 수놓은 나뭇잎에 시선이 집중되었던 도시의 가을을 떠올리며,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도 어디에 머무냐에 따라 반응하는 감각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는 걸 몸소 느낀 지난가을이었다.
고요한 밤이 찾아오면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 귀뚤귀뚤귀뚤.
아득한 소리는 어느샌가 아늑한 자장가가 되어 마음을 안아준다. 그리고 가을의 밤은 깊어간다. 귀를 기울였더니 들리지 않던 소리가 마음에 가닿았고 진정한 가을의 정취는 보는 것보다 듣는 것에 있다는 나만의 공식도 생겨났다. 앞으로 나에게 가을은 들음으로써 깊어질 것이다.
우리의 관계도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면,
작은 마음의 소리를 외면하지 않는다면,
진짜 관계는 거기서부터 싹트지 않을까?
하고 싶은 말은 조금 아끼고
듣는 것에는 빠르게 반응해 봐야겠다.
고양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