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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황장애가 고래상어를 만나면 벌어지는 일

고래상어는 바다 그 자체였다.

by 희서 Mar 2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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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삐-삐-삐-삐-

 보홀의 새벽 다섯 시. 

 어둠을 찢고 알람이 울렸다. 

 

 방 안은 아직 밤의 기운을 품고 있었고, 창밖은 뿌연 새벽이 천천히 밀려들고 있었다. 어슴푸레한 하늘 아래, 어디선가 닭 우는 소리와 먼 스쿠터 소리가 귀를 스쳤다. 세상은 아주 조심스럽게, 느리게 깨어나는 중이었다.


 눈꺼은 여전히 무거웠다. 바다거북을 만나 꿈을 이룬 어제의 희열 고래상어를 만나기 위해 다시 도전하는 오늘의 주저함이 복잡하게 뒤섞여 간밤에 잠을 설쳤다. 피곤함과 새로운 두려움이 작게 피어나고 있었몸을 일으켜 가방을 챙기고, 이불속 아이들을 흔들었다.


 “얘들아, 일어나자. 고래상어 보러 가야지.”


 딸아이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고, 아들은 눈을 반쯤 뜬 채 중얼거렸다.


 “진짜 가는 거야...?”


 졸음에 퉁퉁 부은 얼굴로 두 아이는 조용히 내 뒤를 따랐다. 우리 셋은 어두운 골목을 지나 고래상어 투어를 예약해 둔 현지 여행사 사무실 앞으로 향했다.


 6시 정각. 도착한 사무실 앞엔 이미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단란한 4인 가족. 다정한 모녀, 들떠있는 중년 부부, 혼자 온 여성. 낯선 얼굴들과 나란히 서 있으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느슨해졌다. 어딘지 서로에게 말을 걸 것 같으면서도 조용히 서 있는 분위기.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의 동행은, 어색하면서도 묘하게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 같은 곳을 향한다는 작은 연대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버스에 오르자, 아이들은 내 어깨에 기대 잠들었고 창밖으론 분홍빛 아침이 천천히 번지고 있었다. 야자수와 낮게 부는 바람, 졸음에 젖은 사람들, 점점 가까워지는 바다. 그리고 기대와 주저함이 뒤엉킨 내 마음 함께.


 도착한 해변 사람들로 북적였다. 고래상어를 보호하기 위해 투어는 오전 6시부터 정오까지만 운영되고,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도 제한되어 있었다. 우리는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우리 순서는 꽤 뒤였므로, 기다림은 곧 인내였다. 햇빛은 점점 무자비해졌고, 아이들의 얼굴도 금세 지쳐갔다. 딸아이는 바닥에 주저앉, 손부채질하며 나를 바라봤다.


 “엄마, 고래상어 볼 수 있는 거야?


 나는 물병을 건네며 아이를 다독였다. 사실 내 마음속에도 같은 질문이 떠오르고 있었지만, 이 기다림지나고 나서 아이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다.


 기다림 끝에 만나는 경이로운 순간과 힘들고 지쳐도 포기하지 않아야 할 순간이 있다는 걸.


 그렇게 마음을 다잡던 찰나, 혼자 투어에 참여한 여성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수영하실 줄 아세요?”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웃었다.

 

 “저는 수영을 하나도 못 해요. 그런데도 고래상어는 꼭 보고 싶더라고요.”


 그녀는 3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햇볕에 약간 그을린 피부, 낡은 백팩, 그리고 오래된 피로와 단단함이 공존하는 눈빛.


 “퇴사하고 혼자 여행 중이에요. 석 달쯤 됐네요. 그냥... 나를 어디에라도 데려가고 싶었어요.”


 나는 그녀의 말에 잠시 말을 잃었다. 혼자서, 수영도 못하면서 이 더운 바다 앞에 선 그녀. 그녀는 작아 보였지만, 그녀 안에는 어떤 깊은 용기가 서 있었다.


 ‘이런 사람도 있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뭐람.’


 그녀를 보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나도 나 자신을 조금 더 믿어봐야 겠다고. 오늘은 용기의 날이라고 생각하면서.


 드디어, 우리 차례가 되었다. 구명조끼를 조이고 작은 보트에 올랐다. 물살가르며 우리 고래상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물속으로.


 처음엔 숨이 턱 막혔다. 햇살이 수면을 찢고 들어와 반짝였고, 부유물들은 별가루처럼 흩날렸다. 심장을 누르듯 천천히 숨을 고르고,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물속에서 천천히 다가왔다.


드로잉 by 희서드로잉 by 희서


 고래상어.

 그 존재는 바다 그 자체였다. 

 

 어마어마한 크기, 느리고 우아한 움직임. 눈앞을 지나가는 그 등 위엔 흰 점들이 별처럼 박혀 있었고, 고요한 눈동자는 깊은 신뢰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그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멈춰 선 채, 대한 생명체의 따뜻한 기운을 느끼며, 살아 있다는 감각에 조용히 잠겼다.


 “엄마, 진짜 봤지?”


 아이의 손이 내 팔을 꼭 잡았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우리 해냈어."


 투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숙소로 곧장 가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아직도 해는 머리 위에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고, 몸은 땀에 젖었지만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가벼웠다. 우리는 숙소 근처 해변에 들러 고래상어를 만났던 여운을 다시 바닷속에서 풀었다. 아이들은 물속으로 뛰어들었고, 나는 그 곁에서 조용히 아이들과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 바다, 내가 바다거북과 고래상어를 만났던 그곳. 여전히 파도는 부드럽게 밀려오고 있었고, 발끝에 닿는 바닷물은 시원했다.


 내가 품고 지나온 두려움과 망설임, 그 기다림 끝에 만난 경이로움. 그리고 내 아이들과 함께 나눈 용기. 그 모든 순간, 내가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진짜 나였.

 

 나는 물속에 뛰어들어 아이들 곁으로 갔다. 바닷물은 시원했으며,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청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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