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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년필

by 목소빈

펜촉 위에 그어져 있는, 열쇠구멍을 닮은 금을 따라 잉크가 새어나와 종이 위에 번진다.

그렇게 맺혔다가 스며들며 나의 글씨를 새기듯이 남겨놓는다.

그 글씨가 구불구불 일어나, 열쇠가 되어 내 마음 속의 문들을 하나 둘 연다.

너무 오랫동안 잠겨 있어 벽인줄만 알았던 문들을.


잉크를 다 써버리고 나면 컨버터 속에 남아있는, 먹물묻은 진주같은 쇠구슬을 오래도록 들여다본 적도 있다.

이것은 과연 어떤 이물질을 견뎌내기 위해 만들어낸 것일까, 따위의 생각을 떠올리며.

잉크 속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며 잉크가 잘 흘러가도록 도와주었던 그것.

이제는 더 이상 도울 이가 남아있지 않아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그것을 괜히 이리저리 굴려본다.


또로록, 또로록 소리를 내며

몸에 묻어있던 잉크를 떨궈내고 점점 깨끗하게 빛을 내는 쇠구슬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 쓴 카트리지를 조심스레 빼내고 찰랑이는 검은 잉크가 가득찬 새로운 카트리지를 딸깍, 끼웠다.

펜촉이 종이에 맞닿았을 때, 다시 글씨를 새길 수 있도록.

새로운 문을 여는 열쇠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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