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 나는 검은 머리칼에 덮인
둥근 뒤통수가 아름다워서.
나는 당신을 처음 본 순간 이끌리듯 걸음을 옮겼습니다.
당신의 뒤를 따라가는 내내 형언할 수 없는 독특하고 진한 향이 콧속에 밀려들어 정신이 아득해져 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나는 저만치로 바쁘게 멀어져가는 당신을 재빨리 따라잡아 서서히 보폭을 맞춰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잡힐 듯, 닿을 듯
하면서도
쉬이 좁혀지지 않는 거리 내를 서성이며
당신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걷기를 한참.
그러다가, 마침내
당신의 물기어린 까만 눈동자가 반짝이며 나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투박한 내 손을 그대에게 뻗었습니다.
어쩌면 조금 성급했던 것도 같지만-
바로 그때부터, 우리는 비로소 서로에게 온전히 닿을 수 있게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한껏 조심스러운 태도로 당신을 대하며 망설이기만 하던 나는 이내 나는 점점 대담하고 또 과감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을 눈에 담는 것만으로는, 머리칼을 쓰다듬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서 좀 더 욕심을 부려보았습니다.
조금은 짖굳게.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한 당신을 내게로 끌어당겨,
감히- 당신의 고결한 살결을 입에 머금고 천천히 맛보았습니다. 허기진 걸인처럼 강렬한 충동에 휩싸인 채였지만서도, 때로는 어리광을 부리듯 장난스레 짓씹고 흡입하고 어루만져가며 그대를 실컷 음미했습니다.
당신의 약한 몸부림은 나를 멈추는대신 더욱 달뜨게했고
나는 당신을 내 품속에 가둔 채 계속해서 괴롭혀댔어요.
그러던 중 나는 문득 알아차렸습니다.
커다랗게 구멍이 뚫려있는, 당신의 공허한 내면을. 그곳에서 연신 흘러나오는 씁쓸한 눈물을.
당신에게서 빠져나가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
텅 빈 안쪽의 여린 살결을 쓰다듬듯 어루만지며 나는 물었습니다.
그러자 당신은, 어쩐지 평소보다 더 약해진 듯한 모습으로 느릿느릿 입을 열었습니다.
이곳은, 영원히 품고싶을 정도로 사랑스럽고, 또 자랑스러운 씨앗이 담겨있던 자리였다고. 하지만 수없는 반대와 비난에 시달리다 결국 그것을 제 손에서 빼앗기고 말았으며, 이제는 이를 마음 깊숙한 구석에 묻어둔 채 다시는 꺼내어보지 않고 있다고.
이야기를 마친 당신의 눈망울은 추억에 잠겨 한층 더 아름답고도 서글픈 빛을 머금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있던 나는 당신이 말을 멈추자마자 밀려든 어색한 침묵을 깨고 조심스럽게 위로의 말을 건넸습니다.
당신이 만약 그것을 꼭 쥔 채 끝까지 놓지 않았더라면, 당장은 그것이 만져지고 눈에 보이기에 안심이 되었을지 몰라도 그 씨앗에서 싹이 돋아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거라고. 때로는 잠시 묻어두고 미련없이 뒤를 돌아 나아가고 있으면 어느샌가 나무가 자라나 머리맡에 그늘을 드리워주는 경우도 있는 거라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당신의 눈빛이 순간 꺼져가는 촛불의 속불꽃처럼 위태롭게 일렁이는 것을 똑똑히 보았지만, 나는 모르는 척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아도, 더욱 진하게 번져오는 당신의 향 -처음에는 이상한 끌림이 있는 향이라고만 생각했으나 실은 짙고 검은 슬픔에 젖어있는 것이었던- 만으로도 당신의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끝에 맺히었을 뜨거운 촛농같은 눈물을 즉시 그려낼 수 있었습니다.
_EVILO KCALB
나는 당신의 눈물젖은 이름을 뒤죽박죽 떠올리다가,
그를 구성하는 철자가 얽히고 설키어
우왕좌왕 헤매다가
이내 엉뚱한 소리를 내뱉고야 말았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이 당신에게 무척 잘 어울린다는 말을 했었던가요."
나의 혼잣말같은 질문에,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당신을 온몸이 떨려올 정도로 세게 끌어안은 뒤, 나는 여전히 마르지 않고 당신의 눈가에 매달려있는 눈물을 새빨간 혀끝으로 야살스럽게 훔쳐냈습니다. 그런 나를 약하게 밀어내며, 당신은 그제야 웃음을 흘렸고요.
당연한 말이지만, 그 눈물은 너무나도 짰고
또
지독하게 풍부한 향을 머금고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