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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ptune Oct 11. 2023

욕망 이론

오징어 게임 (2021)


진정한 연기


화제작 <오징어 게임>에 제기되는 불만 중 하나는 VIP들의 어색한 연기이다. 하지만 이 오점을 필연적 요소로 받아들여 보면 어떨까? 연기하는 것이 연기 그 자체라고 말이다. 극 중에서 그들은 쉴 새 없이 떠들며 즐기고 있음을 과시한다. 가면은 신원을 감추기 위한, 즉 불법적 향유를 위한 안전장치일 것이다. 여기서 그것의 또 다른 기능을 가정해 보자. 진정으로 감춰야 하는 것은 그들이 즐기지 못함을 폭로하는 우울한 표정이라고. 그렇다면 어색한 연기는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우리는 즐기고 있는가? 혹은 욕망하고 있는가? 사람들은 SNS에서 언제나 즐거워 보인다. 하지만 스스로 세상을 등진 유명인들의 비극적 사례는 그 어두운 이면을 드러낸다. 진정으로 즐기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가면처럼 보인다. 가면을 쓰고 우리는 늘 새로운 것, 보다 자극적인 것을 찾아 헤맨다. 그러다 문득 그 안의 내가 이미 늙고 지쳤음을 깨닫는다.


예비 테스트


우리의 예비적 작업은 소망과 욕망의 구분에서 시작된다. 본게임이 시작되기 전 테스트인 '딱지치기'부터. 소망은 게임에서 이겨 돈을 받는 것이다. 욕망은? 정신분석에 따르면 욕망은 착오 행위를 통해 드러나곤 한다. 가령 의장이 "개회를 선언합니다" 대신 "폐회를 선언합니다"라고 말해버리는 경우가 그렇다. 우리는 가엾은 의장이 회의를 열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개회를 선언했다고 짐작한다. <오징어 게임>에서 기훈(이정재)은 양복남(공유)에게 연달아 패배한 후 뺨을 수차례 얻어맞는다. 그러다 한 번 이기자 돈을 받는 것을 잊어버리고 뺨을 때리려 한다. 어느새 그는 게임이 유발하는 상황과 감정에 충실해진 것이다. 다시 의장의 사례로 돌아가 보자. 만약 그의 욕망이 폐회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 깊은 소망에 불과하다. 욕망은 그가 근엄한 목소리로 어처구니없는 말을 내뱉으며 지속하려는 ‘무엇인가’이다. 이 무엇인가는 의식적 내용이 아니라 차라리 어떤 과정에 가깝다. 앞으로 전개될 게임들은 일종의 정화 작용으로 우리를 욕망의 보다 순수한 형태에 도달하도록 한다. 다양한 소망을 지닌 인물 군상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모였다. 하나둘 사라져 가며 소망들도 사라진다. 최후의 한 사람, 하나의 욕망만이 남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


<오징어 게임>의 세계는 허당스럽다. 감시망은 치밀해 보이는 외양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하지만 첫 번째 게임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이것이 체제를 불안하게 하기는커녕 우리의 욕망을 작동시키기 위한 필수 조건임을 보여준다. 술래 로봇의 눈은 시야의 한계 속에서 참가자들의 움직임을 기계적으로 감지한다. 결과적으로 ‘봄 / 보지 않음’ 이외의 규칙에 존재하지 않는 ‘보이지 않음‘이라는 잉여의 영역이 산출된다. 이곳이 게임이 흥미로워지는 지점이다. 룰을 빠르게 습득하고 허점까지 간파하는 것이 참가자의 능력이고 여기에 보상이 따를 것이다. 이와 같은 능력주의는 법치주의와 한 쌍을 이룬다. 낮에 강자들은 법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약자들에게 준법을 강요한다. 밤이 되면 조폭들이 약자들을 때려죽인다. 이 일은 보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진행된다. 이제 약자들은 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한다. 술래 로봇의 눈이 사악해 보이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그것은 우리를 감시한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죄를 지어 보라고 부추긴다. 깊이가 없으며 전지적인 두 눈은 우리의 죄를 보고 비웃는다. 너의 죄를 변명해 보라고. 그리고 더 큰 죄를 저질러 보라고… 그렇게 눈은 우리를 지배한다.


사람 없는 디즈니랜드


VIP들의 도착적 욕망은 스스로를 눈의 위치에 놓으려는 것에 있다. 따라서 그들의 욕망은 본질적으로 가면을 향한 욕망이다. 욕망 자체보다 욕망의 조건을 향한 욕망. 첫 번째 게임의 대량학살 이후 모든 과정은 동의하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참가자들이 시원적 범죄를 보편적 규칙의 소급적 적용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들이 짊어져야 할 원죄로 치환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죄에 죄를 거듭하며 살인자들이 되어간다. 모두 똑같은 죄인들이며 기훈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제 VIP들은 아무 죄책감 없이 죽음을 즐길 수 있다. <오징어 게임>이 선사하는 미적 경험은 이 죽음의 놀이동산에서 참가자들이 사라져 감에 따라 느껴지는 공허의 감각에 있다. 우리는 게임이 지속될 수 없음을 예감한다. VIP들이 있던 장소에 남겨진 것은 눈 없는 가면들이다. 극의 마지막에서 일남(오영수)은 본인 소유로 보이는 거대한 빌딩 안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하고 있었다. 최후의 내기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게임이란 단지 함께 하기 위한 텅 빈 제스처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오징어 게임의 비극은 게임이 자신의 존재 조건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데 있다.


하나


게임이 끝난 후 한 사람 기훈이 남았다. 그 역시 게임이 진행되어 감에 따라 남들과 같아졌다. 우리의 일상의 경험 또한 그렇다. 우리는 종종 오랜만에 만난 누군가가 변했다고 느낀다. 대개의 경우 그는 삶에 찌들어 무엇인가를 잃었다. 끝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하며 마치 하나의 잣대가 인생의 성패를 가름하는 것처럼 말한다. 어느 누구도 여기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기훈은 '구슬치기' 게임 이후 죄책감으로 필사적 저항을 시작한다. 이것은 오징어 게임의 세계가 조장하는 욕망에 대한 거부이다. 그는 떠나간 사람들의 소망을 복구하려 애쓴다. 그의 빨간 머리는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표식 하기 위한 절박한 몸부림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자신만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수많은 헤어스타일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 정도일지 모른다. 우리 앞에 우리를 보다 고급지게 해 줄 수많은 상품들이 있다. 대중문화는 다양한 인종, 문화, 계급, 성적 지향의 향연을 보여준다. 이것은 가능성의 유토피아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질문에 도달한다. 이 세계를 작동시키는 것이 자본의 논리를 따르는 단 하나의 욕망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기훈은 여전히 의문에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욕망 이론


이 작품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2019)>과 함께 다루려는 시도들은 아직 불충분하지만 흥미롭다. 우리는 한국적이라 부를 수 있는 무엇인가가 동일한 배경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직감하는 것일지 모른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는 나라, 대신 온갖 호화스러운 편의시설을 갖춘 신축 아파트들이 들어서는 나라. 이곳의 뒤틀린 욕망의 조감도를 그리다 보면 특이한 혼종이 나타날 것이다. 한우 채끝 짜파구리 같은, 최고에서 최하까지 계급과 욕망의 뒤섞임 말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형사의 실종된 형은 고시원에서 라캉의 '욕망 이론'을 공부하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는 욕망에서 이론의 문제로 들어섰다. 일찍이 라캉은 마르크스로부터 잉여 가치를 차용해 잉여 향락을 개념화했다. 두 이론의 은밀한 뒤섞임은 현재의 한국의 작품들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 같다. 그러니 한우 채끝 짜파구리를 즐기자. 죄책감과 함께.


(2021.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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