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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ptune Oct 23. 2023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구슬들

어느 가족 (2018)


고레에다 감독은 그동안 가족을 통해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를 풀어 왔다. 그런데 2017년작 <세 번째 살인>은 이제까지와 결이 다른 어떤 단절을 보여준다. 이후 그는 <어느 가족>에서 다시 가족을 주제로 삼아 자신의 이전 작품들을 노골적으로 반복한다. 그렇다면 그동안 쌓아온 영화적 자산에 <세 번째 살인>의 무엇인가를 새겨 넣으려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검토하고자 한다. 먼저 그의 영화들에서 지속되는 환영, 그리고 <어느 가족>으로 획득한 가족의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가능성(과 실패), 마지막으로 실패한 환영으로서의 영화 그 자체의 의미.


바라보기


우선 데뷔작인 <환상의 빛 (1995)>으로 돌아가 보자. 여기에 그의 가족의 원형과 같은 무엇인가가 있다는 가정하에. 이 영화에서 반복되는 이미지는 어두운 내부의 틀을 통한 ‘바라보기’이다. 유미코(에스미 마키코)는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의 삶은 주기적으로 엄습하는 수수께끼들로 피폐해져 간다. “그 사람이 왜 그랬을 것 같아?” 남편의 답은 간단하다. “바다가 부르는 것 같았대… 아버지가” 이것은 틀린 답이다. 그녀는 자신이 바라본 무엇인가의 의미를 물었다. 하지만 그는 ‘의미’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의 ‘존재’로 답했다. 빛에 이끌리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온 아버지. 영화의 마지막에서 유미코는 시아버지와 함께 가족의 행복한 한때를 바라본다. 의미는 더 이상 바라본 것의 내용에 있지 않다. 그것은 바라보기 자체에 있다. 그녀는 바라보는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떠맡기로 한 것 같다. 이 주제는 차기작 <원더풀 라이프 (1999)>에서 반복된다. 여기서 바라보기는 보여지기와 한 쌍을 이룬다. 모치즈키(이우라 아라타)는 옛 약혼자를 통해 자신이 누군가의 소중한 기억 속에서 보여지던 존재였음을 깨닫는다. 그렇다면 주인공들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바라보기-보여지기라는 존재적 연루에 있는 것이 아닐까?


바다를 둘러싼 환영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에서 바라보기는 묵묵히 가족을 지켜온 할머니라는 존재에 투사되곤 한다. <어느 가족>에서 그는 이를 하나의 환영적 장면으로 그려낸다. 여기에 수평적으로 배치되는 세 가지 요소가 있다. (1) 바다(죽음, 혹은 궁극적 무의미) (2) 바다와 땅의 경계에서 노는 가족들(모순 속에서 지속되는 삶) (3) 뒤에서 바라보는 할머니(무의미를 견디는 존재). 시선의 방향은 역순이며 다음과 같은 상호 관계를 맺고 있다. (3)은 (2)의 가능 조건이다. 하지만 (2)에게 (3)은 비가시적이다. (2)는 (1)과 (3) 사이에 있다. 따라서 (3)은 (1)과 직접 대면을 피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2)는 (3)의 가능 조건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계를 논리적 구조로 도식화하면 바다라는 무의미를 중심으로 둘러싼 뫼비우스의 띠가 그려질 것이다. 이 띠는 바라보기-보여지기라는 한 방향으로 순환한다. 보여지는 존재에게 바라보는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야 비로소 보여지는 존재는 가능 조건으로서의 바라보는 존재를 깨닫는다. (3)은 띠가 풀리지 않도록 하는 봉합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할머니는 무의미에 맞서야 한다. 종종 무너지기도 하지만. <걸어도 걸어도 (2008)>에서 그녀는 방안에 들어온 노랑나비라는 의미의 한 조각을 붙잡기 위해 허우적거린다…


단절


감독의 영화들이 가족 내부에만 머물고 있던 것은 아니다. 가령 <아무도 모른다 (2004)>에서 우리는 사회적 메시지를 도출할 수 있다. 이 영화의 가족들은 ‘남겨진 자들’ 일뿐 아니라 ‘배제된 자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사회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우리는 암담한 현실에 대한 사회적 해결책의 부재가 아이들의 삶에 내재화되는 과정을 본다. 이는 잔인할 정도로 철저히 일방적으로 진행된다. 그런데 <세 번째 살인>은 전작들과 단절을 이룬다. 왜냐하면 여기서 개인과 사회와의 갈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사회의 정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죄인의 낙인을 찍는 사법체계의 메커니즘을 폭로한다. 물론 미스미(야쿠쇼 코지)는 죄를 지었다. 그를 대하는 사법 권력의 태도는 너는 어차피 죄인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적당히 거래를 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스스로의 진실을 지키기 위해 허위진술로 처벌받기를 선택한다. 사키에(히로세 스즈)를 구했다는 점에서 그는 성공했다. 하지만 미스미를 변호하던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는 자신이 어느새 살인자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그가 느끼는 곤혹스러움은 어쩌면 감독의 것일지 모른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시게모리는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 질문하는 십자가 속에서 길을 잃었다.


가족으로의 복귀


<세 번째 살인>에서 가족이라는 주제는 주변부에서 어정쩡하게 맴돈다. 사실 억지에 가까운 설정으로 끼어든다. 아들은 오래전 아버지가 판결을 내렸던 죄인을 변호한다. 그리고 죄인은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그의 딸의 존재를 안다… 등등. 반면에 가족이 동기가 되어 승리밖에 모르던 변호사가 진실을 추구한다는 전개는 상투적이기까지 하다. 이에 고레에다 감독은 <어느 가족>에서 도둑질을 일삼는 범죄집단 가족을 내세워 다시금 사회와의 갈등을 시험해 보는 것 같다. 여기서 그는 자기 복제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의 영화적 자산을 총동원한다. <세 번째 살인>에서 가족의 해체와 함께 원자화된 개인들인 시게모리, 미스미, 사키에는 각각 살인자들(사법적 살인자, 살인의 실행자, 살인의 동기를 가진 자)이 되어 간다. 사회는 그들을 구원하지 못한다. 오히려 사회의 정상화라는 명목하에 스스로의 무능력을 감추고 그들에게 죄를 전가한다. 그렇다면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하는 삶의 가능성을 열어줄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가족은 성공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왜 도둑질인가?


<어느 가족>에서 죄가 전가되는 과정은 여러 층위에서 반복된다. 할머니가 팔의 상처를 가리키며 물었을 때 쥬리는 “넘어졌어요”라고 거짓말을 한다. 쥬리의 집에서 폭력은 아빠, 엄마, 아이의 순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죄는 최종적으로 쥬리의 것이다(“잘못했습니다 해야지”). 자발적 거짓말은 <세 번째 살인>에서의 미스미와 같은 죄의 철저한 개인적 내면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죄의 전가 체계는 사회적 메커니즘화되어 노부요(안도 사쿠라)의 직장에서 반복된다. (1) 경영의 어려움은 워크셰어를 통해 노동자들에게 분배된다. (2) 이 어려움 속에서 누가 해고될 것인지는 노동자가 스스로 정한다. 여기서 사회적(이 경우에는 경영적) 무능력은 개인 간의 반목과 갈등으로 치환된다. 결국 누군가가 나쁜 놈이다… 반면에 <어느 가족>의 가족에서 죄는 누구에게도 전가되지 않는다. 오히려 도둑질이라는 죄 자체가 연대원리이다. 이것이 유토피아적인 이유는 사회화 과정 속에서 떠맡게 되는 죄의식으로부터 우리를 면제시키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에서 가족끼리 공유하는 비밀로서의 도둑질은 여러 차례 등장했다. 그런데 <어느 가족>에서 도둑질은 거의 강박의 수준에 이른다. 그 반복적 실행은 그들 사이에 아무 혈연관계가 없음을 가리기 위함이다. 아이에게 도둑질을 시키고 양심의 가책은 없었냐는 질문에 오사무(릴리 프랭키)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그것 말고는 가르칠 게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로서 함께 할 수 있던 유일한 것.


가족의 해체


가족은 결국 해체되고 만다. 사법체계는 이어지는 개별 심문을 통해 가족들을 원자화된 개인들로 나눈 후 서로를 이간질시킨다. 최종적으로 노부요가 죄인으로 결정된다. 쥬리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사회는 다시 정상화된다. 하지만 그 이전에 가족은 이미 내부로부터 해체되고 있었다. 우선 가족을 지켜온 할머니에게 죽음이 찾아온다. 그리고 가족을 이어나갈 전통적 가부장적 아버지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사무는 오늘날 아버지 권위의 추락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이 가족의 연대원리 상 그들은 사회로부터 고립될 수밖에 없다. 가족이라는 닫힌 세계의 틀 안에서 그들은 서로의 삶을 반복하는 악순환에 빠지고 만다. 아키(마츠오카 마유)와 린이 함께 거울을 바라보는 장면은 어떤 미래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키는 이미 노부요의 삶의 궤적을 닮아가고 있었다. 린 또한 아키의 삶을 거울처럼 닮아갈지 모른다. 쇼타는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결정적인 계기는 가게 할아버지에게 들은 “여동생한텐 시키지 마”일 것이다. 자신을 따라 하는 것을 멈추지 못하는 린을 본 후 쇼타는 이 반복을 끝내기로 한다. 그는 자살적인 몸짓으로 또 다른 삶을 선택하기 위한 제로 베이스로의 추락을 감행한다.


눈이 쌓인 풍경



쇼타의 선택은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가족이 결국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어느 가족>은 실패한 영화일까?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이야기한 바다를 둘러싼 환영을 보충할 또 다른 환영의 논리가 필요하다. 그것은 눈이 쌓인 풍경이다.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다. 이전 세계와 단절된 제로 베이스. 눈 위에서 사람들은 같이 논다. 하지만 눈은 언젠가 녹아내릴 것이다. 그렇기에 일시적으로 열린 유토피아에 불과하다. <세 번째 살인>에서 시게모리는 미스미의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꿈을 꾼다. 홋카이도의 눈밭에서 세 사람(시게모리, 미스미, 사키에)이 눈싸움을 한다. 그러다 눈 위에 누워 십자가를 만든다. 우리는 하늘 높은 곳에서 이 불가능한 장면을 바라본다. 셋이 함께 있을 수 있던 유일한 공간은 법정이었다… 다시 <어느 가족>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의 마지막에서 쇼타와 오사무는 눈사람을 만든다. 다음날 눈은 녹아내렸다. 쇼타는 제설된 도로 위를 달리는 버스를 타고 떠난다. 헤어질 때 그들을 감싸고 있는 것은 건조한 현실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구슬들


이러한 환영이 일시적이라 하더라도 무의미하지 않다. 왜냐하면 어떤 잔여를 남기기 때문이다. <어느 가족>의 한 장면에서 쇼타는 노부요와 구슬 사이다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비록 “짝퉁이지만” 엄마와의 추억이 담긴 구슬들이 남았다. 구슬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원환 속에 갇힌 환영적 세계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형태를 지닌 유토피아를 상상할 수 있다. 쇼타는 이것을 바다라고 린은 우주라고 부른다. 린은 작은 통 안에 구슬들을 모으며 논다. 영화는 그러다 문득 밖을 내다보는 그녀를 보여주며 끝난다. 유토피아적 상상력 없이 우리는 현실 자체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볼 수 없다. 여기에 영화의 고유한 가능성이 있다. 영화관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불이 꺼지고 어둠 속에서 개인의 사회적 맥락은 사라진다. 우리는 제로 베이스에서 함께 영화를 보며 논다. 영화가 끝나면 각자의 현실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영화의 매혹적 환영들을 공유한다면 연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가족 영화에도 사회적 힘이 있다. 고레에다 감독은 <어느 가족>으로 자신이 이제껏 가족을 주제로 만들어온 환영들을 그렇게 정의하고 싶은 것 같다.


(2019.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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