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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ptune Nov 07. 2023

오늘날의 글쓰기

유튜브 시대의 글쓰기


글쓰기란 무엇인가?-는 반복적으로 제기되는 질문이다. 반복이 의미가 있으려면 오늘날 글쓰기가 처한 상황부터 점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최근 앎, 혹은 삶의 경험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글은 별로 인기가 없다. 사람들은 독서보다 유튜브를 시청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글은 자막이라는 형식으로, 순간순간 지나가는 영상의 의미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듣는 무엇인가를 요약하고 적절한 반응을 지시한다. 여기서 나는 유튜브를 평가절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기회를 얻었고 자신의 노하우를 공유함으로써 집단지성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문제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 다시 말해 생산된 콘텐츠가 소비되는 방식에 있다.


추천 알고리즘이라는 정신분석


우리는 네모난 검색창 앞에서 일종의 고해성사를 한다. 왜냐하면 검색어들은 미국의 6월 CPI라는 공적 관심사부터 연예인 노출 사진과 같은 은밀한 욕망에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다양한 검색 키워드들을 모아 놓으면 프로이트가 제안했던 그 유명한 ‘자유연상’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렇다면 구글이 하는 일은 분석가와 닮았다. 정신분석에 대한 통상적인 비판-모든 것을 성적으로 해석하는 성적 환원주의-을 고려한 가정을 해보자. 한 개인의 검색어들과 반응을 보인 게시물들을 추적하면 그의 고유한 성적 환상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구글은 우리의 욕망을 자극할 영상들을 추천해 준다. 라캉의 ‘분석가의 욕망’을 따라 나는 ‘구글의 욕망’을 이야기하고 싶다. 이것은 하나의 인격체에 깃든 탐욕과 상관이 없다. AI에 의해 작동되는 기계적 알고리즘, 형식 그 자체이다.


매트릭스라는 공간


절차적 유사성과 달리 분석가와 구글은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라캉에게 있어서 분석의 종결은 ‘환상 가로지르기’이다. 반면에 구글은 우리의 환상을 중심으로 순환하는 영원한 소비주의적 세계를 구축한다. 영화 <매트릭스 (1999)>는 인류가 기계들을 위한 전기 발생장치로 사육당한다는 설정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각자 소지한 스마트폰을 통해 자발적인 데이터 발생장치 역할을 한다. 이 세계에서 구글은 편집증적 망상에서 등장하는 음험한 배후 조종자가 아니다. 매트릭스는 알고리즘이 분석한 개인의 고유한 환상에서 출현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스스로의 진실, 오랜 시간 행해진 수많은 선택들의 결과물과 마주한다. 기만은 이것이 결과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선택이라는 형식으로 주어지는 데에 있다. 우리는 추천 영상을 클릭하고 또 클릭한다…


대혐오의 멀티버스


최근 사람들의 정치적 견해가 극단화되는 경향에 대한 논의들이 오가고 있다. 그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는 것이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이다. 악명 높은 정치 유튜브들의 주요 콘텐츠는 우리의 정치적 환상을 반복 확증시켜 줄 (가짜) 뉴스들이다. 환상에의 충실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들은 포르노의 논리를 따른다. 이 포르노화된 매트릭스에서 선택받으려면 우리는 자신의 의견을 최대한 하드코어 하게 드러내야 한다. 그 결과 극단적 환상들의 충돌이라는 ‘대혐오의 시대’가 열렸다. 그렇다면 서로에 대한 존중만이 유일한 해결책일까? 할리우드적 상상력은 매트릭스와 같은 현실이 공존 가능한 수많은 환상들 중 하나라는 멀티버스 세계관을 제안한다. 이야기는 계속될 것이고, 너는 영원히 선택할 수 있다… 이것은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로서의 디즈니의 꿈이다.


또다시 흐르는 시간


라캉은 일찍이 ‘대학 담화’에 맞서 ‘분석가 담화’를 제시한 바 있다. 그리고 오늘날 글쓰기에 있어서 반복되어야 하는 것은 그와 같은 제스처이다. 나는 글의 고유한 가치를 무시간성에서 찾고 싶다. 실시간으로 흐르며 의미의 현존이라는 현실감각을 구성하는 절대적 시간의 부재 말이다. 우리는 늘 이해를 재촉당한다. 그래서 지나온 삶을 통해 축적된 습관적 사고의 틀로 사태들을 일관적으로 해석하려 한다. 연속된 시간의 흐름이란 주체적 과정에 의해 지탱되는 환상의 차원에 속한 것이다. 환상을 가로지르는 글쓰기는 바르트가 ‘푼크툼’이라고 불렀던, 우리의 마음을 찌르는 사진처럼 어떤 중지를 도입하고 주체를 소환한다. 읽는 그/녀는 공백과 마주할 것이다. 이 빈 공간은 곧 시간이라 불린다.


(2022.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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