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나이 차가 많은 오빠들이 외지로 나가는 바람에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낮에 함께 놀던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나는 혼자 남아있다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일을 마치고 올 때까지 꽤 긴 시간 라디오를 들으며 지냈는데 매일 같은 시간에 방송하는 일일드라마를 즐겨 들었다. 대부분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였는데 해피엔딩도 있지만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았다. 성공한 남자가 첫사랑을 배신하고 돈 많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배신당한 여자가 복수를 다짐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뻔한 스토리인데 그때는 들을 때마다 새롭고 재미있었다.
라디오는 오로지 소리에 집중하면서 무한대로 상상할 수 있어서 좋다. 내가 들었던 허구의 사랑 이야기는 현실에서도 적용되었다. 혹시 배신당할지 모르니 남자 친구를 사귈 때 신중에 신중을 기했고 그럴만한 기미가 보이면 아예 만나지 않았다. 그 완고한 신념은 결혼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겉만 보고 그 사람의 전부를 판단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요즘 아이들은 좋아하는 감정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사귀다 헤어질 때도 휴대폰 메시지로 통보하면 그만이다. 그러고 보면 준범이와 수아는 지고지순한 구석이 있었다. 2학년인 준범이는 솜털이 채 가시지 않는 뽀송뽀송한 외모에 큰 눈을 가졌다. 귀공자처럼 생겼는데 실제 가정환경은 반대였다. 엄마는 어려서 집을 나갔고 아빠는 건축 일을 하느라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조부모가 계시기는 하지만 연로해서 준범이를 세심하게 보살피지 못했다.
마음 붙일 데가 없었던 준범이는 밖으로만 나돌았다. 길거리를 배회하다 아는 애라도 만나면 쫓아가 같이 놀자고 사정했다. 중학생들의 눈에 그런 준범이가 만만해 보였을 것이다. 데려다 잔심부름도 시키고 장난삼아 때리기도 했다. 준범이도 혼자 있는 것보더 형들과 어울리는 게 더 좋았을 것이다. 거친 중학생들과 어울리면서 욕설도 자연스럽게 익혔다.
어느 날 고학년 아이가 씩씩거리며 우리 교실을 찾아왔다.
“선생님, 준범이 좀 혼내주세요!”
“왜?”
“아무 잘못도 없는데 몇 번이나 욕하고 도망갔어요.”
저보다 한참 아래인 아이에게 욕을 얻어먹으니 자존심도 상하고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자기는 평화를 사랑하기 때문에 때릴 수는 없고 선생님에게 알리러 온 것이지 절대 고자질하러 온 건 아니라고 강조했다.
“알았어. 많이 속상했겠구나.”
한 번도 억울한 처지가 되어본 적 없을 선량해 보이는 아이에게 위로를 건넸다. 준범이에게 그 아이를 찾아가 사과하게 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항의하러 오는 아이들이 끊이지 않았다.
준범이가 그러는 건 환경 탓이었다. 아직 준범이가 어리니 가정에서 조금만 더 따듯하게 돌봐주면 얼마든지 고칠 수 있었다. 준범이 아빠에게 그 얘기를 하자 한숨부터 푹 쉬었다.
“지금 준범이한테 가장 필요한 사람은 엄마인 것 같아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간의 사정이야 있겠지만 안타까워서 넘어갈 수가 없었다. 준범이 아빠가 무슨 이야기인 줄은 알지만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다며 힘없이 전화를 끊었다.
한 번은 준범이가 학교에 오지 않아 할머니에게 연락했다.
“냅둬요. 지 애비도 못하는 걸 늙은 우리가 어떻게 하겠어요?”
화난 듯 뚝뚝한 말투에서 할머니의 많은 고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렇게 한참 방황하던 준범이가 어느날 부터인가 달라졌다. 반 아이들한테 짓궂은 장난을 거는 일도 줄었고 심할 때는 급식실까지 이어지던 전교생의 민원이 부쩍 줄어든 것이다. 가끔 빼먹기는 하지만 숙제도 곧잘 해오고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앉아 있는 시간도 늘었다.
‘엄마가 돌아왔나?’
혹시나 싶어 빙빙 돌려 물어봤지만 그건 아니었다. 어느 날 보니 짝꿍인 수아가 준범이한테 어려운 수학 문제를 알려주고 있었다.
“아하!”
나는 슬며시 미소를 띠고 바라보았다. 준범이가 달라진 이유가 다름 아닌 수아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여러 아이가 준범이와 짝을 했다. 그때마다 괴롭힌다고 고자질했는데 이번에는 조용했다. 수아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반 제일 멋쟁이인데다 항상 웃는 얼굴이라 인기가 많았다. 준범이는 수아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 결과로 수아의 수호천사를 자처하고 나섰다. 수아가 우유를 쏟으면 얼른 걸레를 가져와 닦아주고 먹기 싫어하는 시금치도 대신 먹어주었다. 달리다가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고 보건실에 데려가 주었다. 수아도 그런 준범이가 싫지 않은 듯 늘 붙어 다녔다. 수아를 바라보는 준범이의 눈에서 하트가 뿅뿅 쏟아졌다. 그렇게 대놓고 티를 팍팍 내니 모를 리가 있나. 커플이 된 두 아이에게 대놓고 부러워서 놀리는 아이, 말썽꾸러기 준범이가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시샘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나는 점심을 먹은 후 급하게 처리할 일이 없으면 운동장을 몇 바퀴 돈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숨을 내쉬고 들이쉬며 학교 주변을 둘러싼 나무들과 눈을 맞춘다. 그러다보면 머리가 맑아지고 근육도 느슨해진다. 운동장을 몇 바퀴 돌고 나면 어디선가 보고 아이들이 달려온다.
“선생님, 이번 주말에 어디 가실 거예요?”
“산에.”
“선생님, 이번 주말에 블링블링 공연 보러 가요.”
“블링블링?”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한창 인기많은 여자 아이돌의 이름을 일러준다.
“좋겠다. 나도 가고 싶다.”
“같이 가요.”
나는 이런 대화가 정말 좋다. 때로는 이웃집 언니처럼 다정하고 때로는 엄마처럼 푸근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서다. 또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요즘 유행이 뭔지도 알 수 있기 때문에. 물론 아이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른다. 설령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어느 가을 점심시간이었다. 모래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왁자지껄 놀고 있었는데 준범이와 수아만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다 모른다고 한다.
학교 안에 있겠지,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계속 나타나지 않았다. 슬슬 걱정돼 반 아이들과 함게 두 아이를 찾아 나섰다. 우선 학교 안에 외진 곳을 둘러보고 화장실과 과학실에도 가봤다.
“준범아!”
“수아야!!”
아이들과 함께 온 학교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퍼뜩 학교 밖으로 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범이가 수아를 데리고 나가서 길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자칫 잘못해서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어쩌나 불안했다. 벌건 대낮에 별일이야 있겠어, 하다가도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으니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교감 선생님에게 말하니 우선 CCTV부터 확인하자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준범이와 수아가 나란히 교문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부랴부랴 아이들이 갈만한 학교 가까운 문구점, 뽑기 가게, 놀이터를 뒤져보았다. 교감 선생님과 내가 흩어져 주택가 골목을 돌아다녔다.
어느새 5교시 수업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교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 때문에,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 때문에 초조했다. 하는 수 없이 112에 신고를 하고 학교 앞 스쿨존으로 갔다. 교감 선생님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오는 애들 아니에요?”
그때 교감 선생님이 반색하며 길 건너를 가리켰다.
“맞아요!”
어찌나 반갑던지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준범이가 앞에 서고 그 뒤를 수아가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줄 꿈에도 모르는 듯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나와 교감선생님의 호들갑스런 반응에 두 아이가 “왜요?” 하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무사히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마음 졸인 일이 생각나 허탈했다.
“둘이서 어디 갔다 온 거야?”
“수아가 가재 보고 싶다고 해서 보여주려고 갔어요.”
엄한 표정으로 보자 준범이가 내 눈치를 보더니 대답했다.
라라초등학교는 국립공원에 근처에 있어서 몇 분만 가면 산과 계곡이 나온다. 준범이는 일주일 전 형들이랑 계곡에 갔다가 가재를 봤다. 수아한테 그 얘기를 하니 보고 싶다 해서 같이 갔다 오는 길이라고 했다.
학교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밖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집에서 외출할 때 부모님에게 알려야 하는 것처럼 학교에서도 알려야 한다. 알아듣게 설명하자 준범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아도 눈물을 글썽거렸다. 수아가 아무리 모범생이라 해도 이제 겨우 2학년이었다. 2학년이 5학년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는 없었다.
준범이의 깜찍하고 엉뚱한 행동이 떠오를 때마다 미소가 절로 나온다. 온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좋아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빛나 보여서일 것이다. 수아가 있어 온 세상이 장밋빛이었을 준범이는 이제 중학생이 되었다. 남들보다 어려운 형편에 처해있던 준범이가 그 열정과 헌신을 잊지 말고 주어진 삶을 꿋꿋하고 멋지게 살아나가기를 바란다.
아이들은 사랑을 먹고 자란다. 사랑은 햇볕과 같아서 그늘을 밝혀주고 추위도 녹여준다. 준범이에게 수아는 햇볕같은 존재였다.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엄마와 늘 일이 바빠 역시나 집을 비우는 아빠의 빈 자리를 채워주었다. 아이들에게 사랑은 배신과 복수로 얼룩진 어른들의 드라마와 다르다. 내가 좋아하는 가재를 직접 보여주고 싶은 마음과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 작은 관심이 사람을 바꾼다.
선생님, 저 준범이에요.
선생님한테 말도 안 하고 계곡에 갔다 와서 죄송해요. 사실 계곡은 수아가 먼저 가자고 했어요. 그렇게 말하면 수아가 혼날 것 같아 그냥 제가 그랬다고 했어요. 저는 혼나도 괜찮지만 수아는 혼나면 안 되니까요. 수아가 실망해서 저한테 멀어질까 봐 걱정되기도 했고요.
수아랑 학교를 나와 계곡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주택가 골목에 강아지가 어슬렁 거리고 있다가 수아를 보고 막 달려왔어요.
“준범아, 나 저런 강아지 무서워.”
“괜찮아.”
저도 조금 무서웠지만 수아를 지켜야 해서 얼른 개를 막았어요. 사실 그 개는 사람을 물지 않는 똥개였어요. 덕분에 수아한테 멋진 아이로 보이게 되였죠.
계곡에는 큰 바위들이 많아 조심해야 했어요. 수아가 구두를 신고 있어서 넘어질 수도 있으니 조심조심 손을 잡고 올라갔어요.
작은 돌을 떠들자 가재 한 마리가 보였어요. 손으로 얼른 잡아 수아한테 보여줬어요. 저는 하나도 신기하지 않은데 수아는 무척 신기해했어요. 수아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까 빨리 학교에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잊어먹었어요.
수아랑 짝이 되었을 때 너무 좋아 엉덩이춤을 추었어요. 견우가 맨날 수아랑 짝이라며 자랑해서 부러웠는데 이제는 안 그래도 되었어요. 다른 짝은 제가 조금만 장난쳐도 눈을 흘기고 선생님한테 일러바쳐요. 책상가운데 넘어 오지 못하게 하고 지우개 좀 빌려달라고 해도 들은 척도 안 해요. 제가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듣는 아이였다면 그러지 않았겠죠?
수아는 제 말을 잘 받아주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친절하게 알려줘요. 수아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공부 시간에 한 눈 팔지 않았어요. 아는 것 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아서 지루해도 꾹 참았어요. 아침에 지각할까 봐 일찍 잠자리에 들었어요. 그래야 지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학교에 빨리 가 수아를 보고 싶기도 하고요.
할머니는 제가 왜 그런지 몰라요. 관심도 없고 저도 말하기 싫어요. 다른 애들은 학교 끝나면 학원이나 집으로 가는데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집에 가봐야 할머니는 말 안 듣는다며 야단만 치고 할아버지는 폐지를 주우러 다니느라 늘 집을 비우니까요. 강아지도 없고, 텔레비전도 고장 났고, 놀아줄 형이나 동생도 없는데 가고 싶겠어요? 할 일이 없으니까 밤늦게까지 돌아다니고 중학생 형들하고 어울려 다니게 되었어요. 집보다는 그 형들하고 있는 게 덜 외롭잖아요.
수아가 우리 할머니라면 좋겠어요. 그러기엔 너무 나이가 많지만 상상은 자유잖아요. 수아한테 잘 보이려고 애쓰는 마음 선생님이 알아주시니 고마워요. 비록 옆에서 숙제도 봐주고 간식도 챙겨주는 엄마는 없지만 수아가 있어서 학교 가는 길이 즐거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