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1월 초하룻날이다. 세월은 살같이 흐른다. 손녀딸 등하원을 우리 부부가 도맡은 지도 어언 8개월이 지났다. 힘들기는 하지만 깨알 재미가 있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어제 손녀딸 하원을 사위가 맡아했는지라 손녀딸이 더 보고 싶어지는 아침이다.
딸네 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손녀딸은 벌써 일어나 거실에 한바탕 놀이터를 벌여 놓고 있었다. 각종 캐릭터 인형들이 거실 매트 거의 절반 가까이를 뒤덮으며 나뒹굴고 있었고 손녀딸은 매우 즐거운 듯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딸내미 말에 의하면 새벽 네 시에 깨어, 저러고 있다고 한다. 그럼 무려 두 시간 반째 저렇게 놀고 있는 것이다. 기침을 하다가 잠이 깬 것 같다고 한다. 가끔 콜록콜록 기침을 한다. 딸내미도 몸이 시원치 않아 보인다. 이럴 때일수록 아내와 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딸내미와 사위가 출근한 아후에도 손녀딸은 계속 아까의 하이 텐션을 유지하며 놀고 있다. 밥도 먹이고 옷도 입히고 감기약도 먹여야 한다. 그래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밥을 먹자며 손녀딸을 손녀딸 전용 의자에 앉혔다. 손녀딸에게 어떤 프로그램을 볼 거냐고 물었더니, 손녀딸의 선택은 영락없이 '캐치 티니핑'이다.
아내가 손녀딸 아침밥으로 사과와 배, 그리고 야채를 듬뿍 넣은 볶음밥을 준비했다. 내가 볶음밥을 손녀딸 입 속에 한 숟가락 떠 넣어 주었다. 몇 번 씹는 듯하던 손녀딸은 "매워." 하면서 씹던 볶음밥을 냉큼 뱉더니, 다시 떠먹이려고 해도 좀체 먹으려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사과와 배만 먹였다. 그나마 사과와 배는 잘 받아먹어 다행이었다. 몸이 안 좋은지 손녀딸이 맥이 좀 없다. 하긴 두 시간 넘게 그렇게 신나게 놀았으면 몸이 좋은 상태라도 맥이 없을 만도 하지만, 자꾸 기침을 콜록거려 신경이 몹시 쓰인다.
아내가 손녀딸에게, "순돌아, 어린이집 가지 말고 할머니 집에 가서 놀까?"라고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은 어린이집에 가겠다는 것이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아내가 몇 번 다시 물어보았지만, 손녀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무슨 일만 있으면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고 울고불고하는 것보다야 백배 천배 낫지만, 마음이 짠한 건 어쩔 도리가 없다.
애착 인형 보노와 루피, 패티 등의 뽀로로 캐릭터 인형들을 데리고 딸네 집을 나섰다. 오늘은 어린이집에서 체육 활동이 있는 날이라 바지를 입혔다. 손녀딸이 치마를 워낙 좋아해서 한때 바지 입히기가 만만치 않았는데, 이제 바지를 곧잘 입는다. 오늘 아내가 청바지를 보여주자, 자기는 청바지 좋아한다면 군말 없이 입었다고 한다. 바지를 입었으니 신발은 당연히 운동화다. 바지에는 구두가 안 어울린다는 걸 아는, 패셔니스타 우리 손녀딸이다.
어린이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손녀딸은 애착 인형 보노를 꼭 끌어안고 가만히 있는다. 늘 하던 할머니와의 역할 놀이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일찍 일어났으니, 졸리고 피곤할 만도 하다, 아내가, "졸리면, 어린이집에 가서 자."라고 말하자, 손녀딸은 어린이집에 가면 졸리지 않을 거라고 대답한다. 아이들이란 졸음을 쫓아가며 친구들과 놀기 마련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과 한바탕 신나게 놀며 감기를 이겨냈으면 하는 마음이다.
어린이집에 도착해서 실내화로 갈아 신고 있는데, 같은 반 아이가 왔다. 그 아이가 먼저 신발을 갈아 신고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가자, 손녀딸은 그 아이와 손을 잡고 가겠다며 서둘러 어린이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니, 손녀딸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그 아이에게 달려가 손을 잡는 게 보였다. 두 꼬마는 이내 엘리베이터 안으로 쏙 들어갔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아침에 감기로 콜록거리는 손녀딸을 본 터라 조금이라도 일찍 손녀딸을 하원시키기 위해서이다. 아내는 여러 가지 집안일로 바빠 나 혼자 왔다. 조금 뒤, 손녀딸이 여러 아이들 틈에 섞여 나왔다. 나를 보고도 특별한 표정이 없다. 보통 때라면 '멍키(monkey), 멍키(monkey)!' 하며 내 목을 끌어안으며 매달리는데 말이다. 감기로 컨디션이 썩 좋지 않은 게 분명하다.
서둘러 차에 태웠다. 어린이용 카 시트에 앉히고 안전띠를 매 주는 동안에도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는다. 애착 인형 보노를 끌어안고 보노 꼬리에 연신 입술을 문지르고 있다. 어서 집에 가서 할머니가 준비해 준 맛있는 간식을 먹자고 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영 식욕이 없나 보다.
어느 때보다 조심스레 차를 몰고 딸네 집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되어 있는 딸내미 차가 보였다. 딸내미도 몸이 아파 조퇴를 하고 병원에 들렀다가 집에 와 있겠다더니, 벌써 병원에 다녀온 모양이다. 손녀딸을 내려주기 좋은 자리를 찾아 주차를 한 다음, 손녀딸 안전띠를 풀어주며 "순돌아, 엄마 벌써 집에 와 있네. 빨리 엄마한테 가자."라고 했더니, 그 말을 듣자마자 손녀딸 눈에 눈물이 그렁거린다. 그러더니 곧 눈물을 쏟을 태세다.
어찌어찌 손녀딸을 어르고 달래며 엘리베이터에 어렵사리 올라탔다. 짐이 많아서다. 손녀딸 어린이집 가방을 한쪽 어깨에 울러 매고, 아내가 딸내미에게 갔다 주라고 한, 제법 묵직한 가방을 한 손에 들었다. 겨드랑이 사이에 손녀딸 애착 인형 보노를 낀 채로 말이다. 게다가 가방을 든 그 손에, 손녀딸이 아침에 가지고 갔던 블록 놀이가 든 작은 상자를 들어야만 했다. 가방을 손에 든 채로 들어야 하니, 엄지와 검지로만 그 상자를 들 수밖에 없었다. 가히 묘기 수준이다. 게다가 다른 한 손으로는 손녀딸 손을 꼭 잡아야 한다. 지하 주차장이니 차가 수시로 왔다 갔다 하니 말이다. 어쨌든 무사히 엘리베이터를 탔다.
딸네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딸내미가 손녀딸 이름을 부르며 현관 쪽으로 달려왔다. 손녀딸은 신발을 벗자마자 딸내미 품에 안겼다. 그런 다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제 엄마 품에 그저 가만히 안겨 있는다. 딸내미가 손녀딸을 안고 거실 소파로 가서 앉았다. 거기에서도 손녀딸은 한동안 가만히 엄마 품에 안겨 있었다. 딸내미가 뭐라고 물어도 대답도 잘하지 않는다. 그러더니 어느 틈엔가, 엄마 품을 벗어난 손녀딸이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동그란 플라스틱을 직사각형의 플라스틱 상자에 집어넣고 있다. 동그란 플라스틱의 양이 제법 많다.
손녀딸 컨디션이 어느 정도 회복되었구나 싶어 손녀딸에게, 할아버지는 이제 집에 가겠다고 했다. 딸내미가 손녀딸에게, "순돌아, 할아버지 가신대. 할아버지한테 뽀뽀해 드려."라고 했더니, "할아버지, 저 지금 이거 하고 있잖아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라고 한다. 세상에 그렇게 공손하고 조신하게 말할 수가 없다. 어찌, 아니 기다릴 수 있겠는가. 손녀딸이 그 동그란 플라스틱을 상자에 다 넣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딸내미 집을 나섰다. 동그란 플라스틱을 다 집어넣은 손녀딸의 뽀뽀를 받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