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2014. 11. 11.(월)
딸네 집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손녀딸은 아직 단잠에 빠져 있다. 다행이다. 아침잠을 푹 자야 손녀딸 컨디션이 좋을 테니 말이다. 주말에 손녀딸을 못 본 터라, 손녀딸 방으로 가 손녀딸이 자고 있는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가들은 잘 때가 제일 예쁘다고 했던가. 천사가 따로 없다.
일곱 시 십 분쯤, 다시 손녀딸 방으로 가 보았다. 잠이 깨려고 하는지, 손녀딸이 몸을 뒤척이더니 이내 애착 인형 보노 꼬리에 제 입술을 대고 문지른다. 그러다가 내가 서 있는 걸 본 모양이다. 눈을 뜨지도 않은 채, "등 긁어 줘."라고 하더니 엎드린다. 좀 더 자라고 살살 가볍게 등을 긁어 주었다.
손녀딸이 좀 더 잘 줄 알았는데, 그대로 잠이 깨었다. 할머니를 찾는다. 거실에서 이런저런 잡일을 하고 있던 아내가 손녀딸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워 있는 손녀딸 옆으로 가 손녀딸에게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손녀딸은 팔로 할머니 목을 끌어안는다. 손녀딸과 할머니는 한동안 그러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내가 손녀딸을 안고 거실로 나왔다. 아내가 손녀딸을 내게 건네며, "할아버지에게 패스!"라고 하자, 손녀딸이 "패스가 뭐예요?"라고 묻는다. '패스'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는데, 다음번에 과연 손녀딸이 '패스'의 의미를 기억할지 자못 궁금하다. 언어 감각이 뛰어난 우리 손녀딸이니 기억하리라 생각하지만, 어떨지 잘 모르겠다.
늘 그렇듯이, 아내가 차려 온 아침밥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여주려고 했더니, 손녀딸이 "나, 티브이 안 볼래."라고 한다. 우리가 손녀딸을 돌본 지 어언 9개월이 다 되어가는데, 이는 사상 초유의 일이다. 어쨌든 간에 좋은 일이다. 책을 읽어 달라고 해서, 책 세 권을 읽어 주었다. 공주 이야기가 나오는 책을 마저 읽어 주려고 했더니, 그건 할머니가 읽어야 한다고 해서 그만두었다.
오늘 손녀딸은 완전 '착한 아이 모드'를 장착했다. 할머니, 할아버지 말을 아주 잘 들어준다. 단 한 가지 경우만 제외하고 말이다. 아내가 옷을 입히려고 하자, 손녀딸이 조금 있다가 입겠다고 했다. 병원에 들러야 해서, 아내가 지금 입어야 한다고 하니까 손녀딸이 약간 삐졌다. 뭐라고 하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손녀딸이 뭐하고 있나 싶어 내가 손녀딸 방으로 가니, 손녀딸이 나에게 안긴다. 손녀딸을 안아 올리며, "순돌아, 이제 옷 입어야 돼."라고 하니까, 할아버지가 옷을 입혀 달라고 한다. 이게 오늘 손녀딸이 부린 심통의 전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다.
옷을 다 입고 나서, 텔레비전을 조금만 보겠다고 해서 텔레비전을 틀어 주었다. 그러면서 양치질도 하고 얼굴 보습도 하는 등 어린이집 등원 준비를 다 마쳤다. 어린이집에 가기 전 병원에 들러야 해서, 이제 출발을 해야 했다. 그래서 "순돌아, 이제 텔레비전 꺼야 해."라고 하면서 리모컨을 손녀딸에게 쥐어 주며 "자, 빨간 버튼 눌러."라고 말했다. 싫다고 하며 짜증을 내면 어쩌나 내심 걱정했다. 웬걸, "네. 이건 다음에 볼게요."라면서 빨간 버튼을 눌러 텔레비전을 껐다. 오, 정말 완전 '착한 아이 모드'를 풀로 장착한 오늘 우리 손녀딸이다.
병원에 들렀다가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손녀딸 감기도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그래도 항생제는 이틀 더 먹어보자고 했다. 이 정도면 항생제는 그만 먹어도 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좋아졌다니 다행이다. 약국에서도 손녀딸은 사고 싶은 게 있었는데 꾹 참는 눈치다. 할머니하고 오늘은 아무것도 사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또 감기약을 먹으라고 하니까, "이 약은 맛이 없어!"라고 하면서도 입을 크게 벌리고 잘 받아먹는다. 참 여러모로 기특하다. 어린이집에 도착해서 실내화로 갈아 신고, 어린이집 안으로 들어간 손녀딸은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스쿠터를 타고 손녀딸을 하원시키러 어린이집에 왔다. 아침에 손녀딸이 스쿠터를 가지고 데리고 오라고 했다. 누구 말이라고 아니 듣겠는가. 때마침 날씨도 스쿠터 타기에 안성맞춤이다. 아내가 몸도 좋지 않고 성당 반 모임도 있고 해서 나 혼자 손녀딸을 데리러 왔다.
하원 첫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손녀딸이 두 번째로 걸어 나왔다.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다. 어린이집에서 목공 체험을 한다더니 그 결과물인 듯싶다. 손녀딸을 데리고 어린이집 옆에 있는 놀이터로 갔다. 거기에 스쿠터도 세워 두었다. 루틴대로, 손녀딸이 놀이터에서 좀 놀다 갈 줄 알았는데 스쿠터를 보자마자 손녀딸은 냅다 스쿠터에 올라타려고 한다. 빨리 집에 가서 애착 인형 보노를 보고 싶단다.
스쿠터에 손녀딸을 태우고 제천 옆으로 나란히 나 있는 자전거 도로를 달렸다. 바람이 부드럽게 뺨을 스친다. 손녀딸 마스크를 가지고 오지 않아서 손녀딸이 춥지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손녀딸에게 물으니 괜찮다고 한다. 어린이집에서 재미있게 놀았냐고 물어보니까, 뭐라고 한참 종알종알 대답을 한다. 스쿠터가 달리는 통에 손녀딸의 이야기는 바람에 흩날려가 버려 손녀딸이 뭐라고 하는지 정확히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손녀딸과 나의 대화는 딸네 집에 도착할 때까지 그렇게 계속되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손녀딸이 옷을 다 벗어던진다. 그러더니 자기 옷장 서랍에서 내복을 꺼내는데, 하필 반소매 옷이다. 춥다고, 긴소매 옷을 입자고 했더니 한사코 자기가 꺼낸 걸 입겠단다. 그러면서 이불을 덮으면 된다고 하면서 이불을 끌고 거실로 나가 애착 인형 보노를 끌어안는다. 나더러 이불을 덮어 달란다. 덮어 줄밖에. 한동안 그 자세로 보노 꼬리를 쪽쪽 빨았다. 매우 흡족한 얼굴로. 그러더니 갑자기 심심하단다. 책을 읽어 달라고 한다. 준비해 간 간식을 먹으며 내리 다섯 권을 연달아 읽어 주었다.
책 읽기도 시들해졌는지, 손녀딸이 자기 놀이방으로 간다. 뒤따라 가 보았더니, 색종이를 꺼낸다. 분홍색 색종이를 찾아 접고 풀칠을 하더니 또 접는다. 그때 딸내미가 퇴근해서 집에 왔다. 그런데 갑자기 손녀딸이 자기가 접은 색종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그것을 버리겠다고 한다. 잘 못 접었다는 것이다. 딸내미가 손녀딸에게, 다시 접으면 잘 접을 수 있을 거라고 얘기했자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자기는 잘 접을 수 없을 거라며, 이제 색종이 접기는 하지 않겠다고 하며, 앙앙 운다. 괜찮다고, 아가 때는 누구나 잘할 수 없다고, 엄마도 그랬고 할아버지도 그랬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통하지 않는다.
우리 손녀딸의 완벽주의가 다시 발동했다. 단번에 자기 마음에 들게, 완벽하게 일을 해 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말이 쉽지, 그게 맘처럼 되는가. 더군다나 네 살배기가 말이다. 그런 상황이 생길 때마다 계속해서 괜찮다고, 잘 못해도 된다고, 찬찬히 노력하면 할 수 있다고 말해 주는 수밖에 없을 터이다.
정말 다행인 건, 딸내미가 그런 상황에서 정말 지혜롭게 헤쳐나간다는 사실이다. 손녀딸에게 일단 공감해 주며 조근조근 이야기를 건넨다. 물론 처음에는 아무 효과가 없다. 그러나 딸내미는 끝까지 손녀딸에게 차분하게 말을 건네며 손녀딸을 진정시키려고 한다. 그렇다고 손녀딸의 투정을 모두 다 들어주지도 않는다.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분명히 이야기를 하고 손녀딸이 지금 뭘 잘못하고 있는지도 분명히 이야기를 한다. 슬기로운 딸내미가 있으니, 우리 손녀딸도 차츰차츰 이런 상황을 잘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딸내미가 계속 차분하게 이야기를 건네니. 손녀딸의 울음이 진정되었다.
거실로 나와 딸내미는 저녁 준비를 하고, 그동안 내가 손녀딸과 좀 더 놀아 주었다. 손녀딸은 언제 울었냐는 듯, 깔깔대며 재미있게 놀았다. 이불로 자기를 들어 앞뒤로 흔들어 주는, '로켓 놀이'를 자꾸 해 달라고 한다. 할아버지의 근력을 강화시켜 주려는 손녀딸의 고도의 전략이라고 생각하고 할 수 있는 한 여러 번 '로켓 놀이'를 해 주었다. 힘은 들었지만, 손녀딸이 좋아하니 나도 좋았다.
딸내미가 저녁 준비를 다 마쳤다. 손녀딸과 딸내미의 배웅을 받으며 딸네 집을 나선다. 손녀딸에게, 할아버지한테 뽀뽀해 달라고 했더니 입을 오리 주둥이처럼 내밀며 내 뺨에 뽀뽀를 해 준다. 이 세상 모든 피로가 싹 사라진다. 퇴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