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hry는 PM Nov 25. 2023

0. 번역팀 PM으로 살아남기

로컬라이제이션 업계에서 PM으로 살아남는 처절한 생존기

내가 만으로 스물네 살이 되던 해, 대학을 졸업한 지 2년 몇 개월쯤 됐을 무렵 첫 직장에 입사했다. 번역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제법 큰 외국계 회사였다. 하지만 당시 나는 통번역학과를 졸업했음에도 불구하고 번역 업계를 잘 알지 못했다. 그랬던 내가 이렇게 딥(Deep)하게... 번역 업계에 들어오게 될 줄은 그때는 잘 몰랐다.


번역 프로젝트를 굴리는 PM(Project Manager)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뛰어난 업무 처리능력 보다도 이리저리 치여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다. 번역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PM이라는 직무 자체가 이 팀과 저 팀, 고객과 내부인원 사이에 끼어서 끊임없이 갈등을 중재해야 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말로 내/외부 모두에게 '을'이라는 뜻이다. 좀 더 PM이라는 직무를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우리는 프로젝트의 구조를 설계하고 고객, 내/외부 리소스와 항상 부족한 일정/비용을 가지고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끄는 가이드다. 


번역은 영어만(혹은 다른 언어를) 대강 할 줄 알면 아주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다수다. 그래서 언제나 '평가절하'된다. 거의 매번 싼값에 쓰이고, 공로를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한다. 비즈니스적인 측면에서도 웬만해서는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존재다. 우리는 중국에서 나온 게임을, 미국에서 방영한 드라마를 휴대폰에서 탭 몇 번으로 쉽게 즐기고 있지만, 우리가 그들의 언어를 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즐길 수 있게 되었는지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번역은 문화/문명의 글로벌화에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아무리 평가 절하되더라도 불변하는 진리다. 로제타 스톤에서도 볼 수 있다. 각기 다른 문자로 기록된 비문이 모두 같은 뜻임을 알았을 때 우리는 이집트 상형 문자를 이해할 수 있었다.


번역 회사는 번역이 필요한 업계 전반에 전문적인 번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번역 회사에는 '인하우스'라고 불리는 회사 내부 번역가들도 있지만, 주로 외부에서 '프리랜서' 번역가를 고용해 번역을 진행한다. 번역회사에서는 보통 프로젝트나 업무가 고객사로부터 비 규칙적으로 요청이 되는데 이 경우 상주인원을 고용하는 게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규모가 큰 프로젝트는 한 명의 번역가가 많은 양의 번역을 한 번에 처리하지 못하므로 여러 명의 번역가를 고용해 작업량을 나누어 진행하는데, 이런 업무 스타일 때문에 번역 회사에는 번역된 문서의 용어, 스타일의  일관성을 맞추고 최종화 하는 프로세스가 잘 마련되어 있다.


내가 회사에서 처음으로 맡은 직무가 바로 프리랜서 번역가가 번역을 마친 작업물을 확인하고 최종화 하는 것이었다. 번역회사에서는 이 포지션을 Linguist (혹은 Lead Linguist; LL)라고 부른다. 내가 나중에 PM으로 전향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LL 직무가 내 성향과 맞지 않은 것이 가장 컸다. LL은 당장 앞에 주어진 번역물에 집중해서 퀄리티를 끌어내는 업무를 주로 하게 되는데 나는 다른 LL들보다 업무에 에너지를 더 많이 소모했고 때문에 실수도 잦았다.


물론 LL 직무가 모두에게 맞지 않는 건 아니다. 이 직무가 특히 사람 성향을 타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다. 요즘 유행하는 MBTI로 표현을 하자면, Linguist는 'I'인 사람들에게 좀 더 잘 맞는 직무이고, PM은 'E'인 사람들에게 좀 더 잘 맞는 직무인 듯하다. 물론 절대적으로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한참 MBTI가 유행하기 시작할 때 당시 회사사람들과 재미 삼아 확인해 봤는데 Linguist는 놀랍게도 90%가 'I'였고, PM은 100% 'E'였다. (물론 매우 비과학적인 개인의 견해임을 감안하여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 MBTI는 ENFP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PM 직무가 더 잘 맞았다. 프로젝트를 더 멀리, 더 큰 그림을 보면서 업무 하는 것도 재밌었고, 프로젝트의 기본 제반 사항을 확인해서 부족한 부분을 보강하고 새로운 방법을 찾고 개발하는 것도 재밌었다. 다른 PM들이 스트레스받는다고 했던 고객을 대하는 일이나, 내외부 리소스의 볼멘소리를 듣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알고 보니 나는 천생 PM이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