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번째 국립공원 팔공산과 대구명물 '뭉티기' 이야기
복국을 마시며 청춘을 되돌리려던 무모한 중년의 세 사나이들이 다시 한번 길을 떠났다. "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면 꼭 산행 한번 같이 하자"는 약속이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다. 목적지는 우리나라의 스물세 번째이자 막내 국립공원인 팔공산(1193m).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과 경북 영천시 신녕면의 경계를 이루는 팔공산은 최고봉인 비로봉을 중심으로 해발 1.150m의 고봉인 동봉과 해발 1,041m의 서봉이 양 날개를 펼친 형상을 이루고 있다. 팔공산은 봉황의 모습으로 대구분지를 감싸는 대구의 진산인데 비로봉이 봉황의 머리이고 동봉과 서봉이 봉황의 날개라는 것이다. 팔공산 갓바위지역에 위치한 갓바위는 오래전부터 아들을 바라는 부녀자들의 기도처로, 최근까지도 수능을 앞둔 자식을 위한 기도 장소로도 유명하다.
팔공산은 1980년 5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 무려 43년, 2016년 8월 태백산이 22번째로 국립공원이 된 지 7년 만에 막내 국립공원으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스물세 개의 국립공원 중 산악형 국립공원은 지리산, 계룡산, 설악산, 속리산, 한라산, 내장산, 가야산, 덕유산, 오대산, 주왕산, 북한산, 치악산, 월악산, 소백산, 변산반도, 월출산, 무등산, 태백산 그리고 팔공산까지 모두 19개이고 해상형이 한려해상, 태안해안, 다도해해상국립공원 3개.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적형 국립공원인 경주국립공원까지 모두 합쳐 스물세 개의 국립공원이 운영 중이다.
20대부터 회사 산악회 총무를 역임하고 평생 산악활동을 해 온 터여서 그동안 열여덟 개의 산악형 국립공원은 모두 등산을 해보았다. 가장 많이 방문한 북한산 같은 경우는 약 200여 회 지리산과 설악산만 해도 각각 20여 번 등반 내지는 산행을 즐겨보았다.
그런데 가장 최근에 국립공원의 반열에 오른 팔공산은 그동안 인연이 없었던 터라 과연 어떤 산세를 하고 있을지 궁금증이 도졌다.
서울역에서 5월의 마지막주 화요일 아침 9시. 서울발 동대구행 KTX에 올라탄 우리는 KTX에도 여러 가지 열차종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탄 KTX는 KTX청룡으로 KTX 중에서도 고속열차였다. 서울에서 동대구역까지 불과 1시간 35분에 주파한다. KTX청룡은 8년 가까운 연구개발 끝에 100% 국내기술로 설계되고 제작되어 바로 올해 5월부터 운행을 시작한 신형열차다. 서울 부산 간을 불과 2시간 10분대로 주파한다고 하니 가히 비행기와 비견될만한 속도가 아닐 수 없다.
KTX청룡이 1분도 틀리지 않은 정시에 출발하는 것을 보니 대한민국도 이제 철도선진국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불과 몇 년 전 독일을 방문했을 때 사전예고도 없이 연착이 되어 놀란 적이 있거니와 이탈리아의 고속열차라는 이딸로(Italo)도 종종 연착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창밖 구경을 하고 기내지를 살펴보다보니 어느덧 동대구에 도착한 우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산행기점인 탑골안내소로 향한다 소요시간은 약 40분 요금은 1만 8천 원.
우리는 산에서 먹을 행동식을 여늬 때처럼 등산로 입구에서 구입하려고 했는데 이것은 전적으로 산행을 계획한 나의 실수였다. 정작 탑골안내소 주변에는 작은 매점만 있을 뿐 흔한 김밥집이나 떡집도 찾을 수 없었다. 부득이 생수와 정상에서 마실 요량으로 맥주 한 캔과 과자 한 봉지씩을 챙겼다. 이런 오늘 산행 내내 쫄쫄 굶게 생겼다. 그래도 싫은 티 하나 내지 않는 친구들이 고맙다.
우리가 잡은 산행코스는 탑골안내소-염불봉-미타봉(동봉)-팔공산 비로봉-서봉-낙타봉-신림봉 그리고 케이블카 하산이었다.
팔공산 탑골 – 비로봉 코스는 생각 이상으로 힘든 편이었다. 탑골안내소의 고도가 해발 600 미터 내외인데 해발 1193미터의 비로봉까지 거의 600미터를 올려야 하니 힘든 것은 당연지사. 그래도 우리가 누구인가? 해발 3776m의 일본 최고봉 후지산 정상을 거침없이 찍고 히말라야를 누비던 건각들 아니었나. 그렇게 호기롭게 탑골안내소를 출발하여 염불암까지 내처 달린다.
염불암은 조계종 본사인 팔공산 동화사의 부속암자라고 한다. 이곳에 고려시대의 석탑이 있다. 돌을 잘 만지는 조상의 후예답게 염불암 주위로 새로 축대를 쌓아 올렸다. 현직 기술사인 친구가 축대를 제대로 잘 쌓아 올렸다고 칭찬한다. 어딜 가나 직업은 속이지 못하는 모양이다.
염불암을 출발하여 계속 고도를 높여가는데 다리도 아프고 피곤도 하여 전망이 살짝 보이는 곳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는지 배에서는 신호를 자꾸 보내고 있다. 과자나 꺼내서 시장기나 감추려고 하는데 이때 한 친구가 배낭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낸다.
오 예~~~~! 4종 과일세트에 팥쑥떡과 오이다. 참외, 방울토마토, 체리, 키위. 정성 들여 준비해 온 과일을 먹고 떡을 하나 먹으니 맛도 좋고 배가 든든하다. 이렇게 정성껏 세명분의 점심 도시락을 싸준 분에게 감사한 마음이 더한다.
충분히 쉬고 다시 갈 길을 재촉한다. 염불암에서 동봉까지는 약 2,9km. 가파른 오르막이다. 팔공산 등산은 고도차이가 크고 돌들이 많아 만만치가 않은 산행이다. 발과 무릎을 조심하며 첫 번째 목적지인 동봉으로 향한다.
동봉까지는 한 두 군데를 제외하고 전망이 좋은 편은 아니다. 그러다가 답답하던 시야가 확 트이는 전망 좋은 장소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안테나들이 서있는 비로봉 정상도 바라다 보인다. 여기서 잠시 다리 쉼을 한 다음 산행을 이어간다. 나무계단을 어렵게 어렵게 올라 드디어 동봉. 사방으로 전망이 확 펼쳐지면서 다소 피로해진 팔과 다리에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이 넘쳐흐른다.
비로봉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봉으로 불리는 이 봉우리의 또 다른 이름은 미타봉, 아미타 부처님의 준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보면 팔공산은 불교와 불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산이기도 하다. 동봉은 팔공산 세 개의 정상 중에 가장 전망이 좋고 정상다운 느낌이 나는 봉우리다.
동봉에서 불과 300미터만 이동하면 팔공산의 주봉 비로봉이다. 동봉은 행정구역이 경북 영천이지만 비로봉은 대구광역시 군위군이다. 비로봉은 모든 곳을 두루 비춘다는 의미다. 비로봉 정상에는 통신사 등의 여러 안테나탑들과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심지어 임도를 따라 올라온 작업차량들도 주차되어 있어 정상 같은 느낌이 들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 정상에서 셀카봉으로 기록을 남기고 마지막 봉우리인 서봉으로 발길을 옮긴다.
일행 중 한 친구가 갓바위쪽으로 산행하고 싶다는 다소 끔찍한(?) 제안을 한다. 비로봉에서 갓바위로 가려면 다시 동봉-염불봉-은해봉-노적봉-갓바위로 산행해야 하는데 그러면 약 7km나 더 산행을 해야 한다. 약 세 시간 반이 더 걸리는 거리. 한참 산행을 하고 백두대간을 내 집처럼 드나들 때야 별것도 아닌 거리이지만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하자고 때아닌(?) 혈기를 달래 본다.
비로봉에서 서봉까지는 약 1.2km. 비로봉을 내려와 오도재(1085m)를 지나 무난하지만 돌들이 많은 등산로를 가다 보니 이윽고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 서봉이다. 다시 한번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전망을 즐기다가 아쉬운 하산길에 접어든다.
낙타를 닮은 듯 아닌듯한 낙타봉을 지나 멀리 바라다보이는 케이블카 건물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다 보니 드디어 이곳이 선림봉 정상이자 케이블카 타는 곳이다.
오랜만에 산행다운 산행을 했더니 부끄럽게 종아리에 알이 배긴듯하고 스틱을 잡아 온 팔꿈치가 뻐근하다. 이 건물에 식당이 있기에 막걸리 한잔과 파전으로 오늘의 산행을 갈무리해 본다.
탑골안내소를 출발하여 나무계단을 오르고 염불암을 지나 동봉 - 비로봉 - 서봉 - 낙타봉을 지나 케이블카가 있는 선림봉까지 모두 8킬로미터를 산행했다. 산행시간은 모두 5시간 정도이지만 운동거리는 4시간.
팔공산은 경사가 급한 편이어서 산행초보자들은 산행 전 준비운동으로 몸을 충분히 풀어주고 스틱을 준비해서 다리의 피로도를 줄여주는 것이 좋겠다. 계획보다 산행이 길어질 것에 대비하여 비상식량 준비는 필수이고 식수공급받을 곳도 별로 없으니 식수도 충분히 준비하자. 팔공산 산행의 크럭스(등반에서 가장 힘든 구간)라고 할 수 있는 구간은 역시 동봉 오르기 전부터 가파른 동봉 오르막 그리고 다시 하산하여 비로봉 오르막 한번 더 하산하여 서봉 오르막 구간이 되겠다. 오르내리를 세 번이나 해야 하니 체력소모가 꽤 된다. 이 말은즉 팔공산 산행은 그렇게 만만하게 볼 산이 아니라는 것.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스틱을 사용하고 서행으로 산행하자.
자 이제 막내 국립공원 산행도 끝났겠다 천천히 대구 막걸리 한 잔을 음미하며 오늘 뒤풀이 장소로 어디를 갈까 잠시 고민을 해본다. 열심히 걷고 땀 흘리고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이 산행의 제일 큰 즐거움이지만 산행 후 뒤풀이 역시 산행의 재미를 더해주는 매력포인트 아닌가.
이럴 때는 단톡방 집단지성이 제일이다. 두 개의 단톡방에 대구에서 뒤풀이로 가장 좋은 식당이 어디냐고 물었다. 매운 갈비찜, 막창, 납작 만두, 따로국밥... 대구에 이렇게 먹거리가 풍성했던가? 그러다가 결정적인 제보가 들어왔다. “대구 하면 뭉티기지예.”
‘뭉티기’. 뭉티기란 엄지손가락 한 마디 크기만 하게 뭉텅뭉텅 썰어낸 한우 생고기를 말한다. 이 고기를 참기름과 다진 마늘, 고춧가루 등으로 만든 양념장에 곁들여먹는 대구광역시의 대표적인 향토음식이 바로 ‘뭉티기’ 아닌가? 우리는 두말할 것도 없이 뒤풀이 식사를 뭉티기로 정하고 서둘러 하산하기로 했다. 배꼽시계가 자꾸 저녁시간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케이블카를 타보기로 했다. 케이블카라기보다는 작은 곤돌라 같은 케이블카를 타고 멀지 않은 거리를 편하게 내려가 본다. 편도요금 1만 원.
미처 가보지 못했던 대구의 진산 팔공산, 불심을 가득 품은 세 봉우리가 사이좋게 늘어서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이 어느덧 인생을 관조하는 나이에 들어선 우리 세 사람과 닮았다고 생각하면 너무 비약일까?
사랑하는 친구이자 산우들과 함께 한 팔공산 산행은 어느덧 내 인생 어느 날의 빛나는 추억이 되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