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투하는 인간
파리 여행을 갔을 때 단연 기억에 남는 장소는 근교에 위치한 지베르니다.
지베르니는 모네의 취향대로 꾸며진 정원으로, 그 유명한 수련 연작이 탄생한 곳이다. 그 아름다운 수련들이 바로 지베르니에서 모네라는 불후의 예술가에 의해 목격되었다.
모네의 그림을 아름답다고 느꼈다면 지베르니의 풍경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구름이 양 떼처럼 고슬거리는 파아란 가을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배치로 심어져 한껏 피어난 꽃들. 정말이지 비현실적인 미(美)를 느꼈다. 고도로 꾸며진 미장센의 영화 속에 들어온 듯했다.
어느 날 플라톤이 말했듯 그림은 '원본 풍경이라는 이데아를 모방한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현실보다 아름다운 그림의 존재를 믿던 내가, 그림을 원본 풍경의 아류로 취급하는 그 말에 엉겁결 끄덕이게 만들 만큼 모네의 정원은 환상적이었다. 모네라는 화가의 위대함이 빛으로 마술을 부린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을 인간의 손으로 감히 옮겨놓았다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입장료를 내면 모네가 말년을 보낸 집에 들어가 볼 수 있다. 모네의 집은 가구 하나, 소품 하나까지도 그의 취향과 미감대로 꾸며져 있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이 뛰어난 화가가 임종을 맞이했다는 침대 옆에 서서, 나는 또 한 번 모든 것이 아름다운 영상미를 자랑하는 영화의 세트장 같다고 느꼈다. 화려한 꽃무늬의 커튼. 각양각색이지만 또 조화를 이루는 파스텔 톤의 가구들. 생기 찬 에너지를 흘리는 라틴풍의 접시도, 청나라에서 가져온 것 같아 보이는 동양풍 도자기도 여기저기서 재치 있는 변주를 주었고, 세심한 디테일이 살아있는 탁상 거울과 시계가 공간에 예술성을 더했다. 방마다 각기 다른 테마가 있어 시각적 즐거움이 계속되었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여겨보며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그런데, 분명 너무나 아름답고 행복한데, 마음속에서 왠지 모를 불편함이 한 톨 느껴졌다. 그 불편함은 내 마음속에서 모래알처럼 밟혀서 아주아주 작지만 차마 무시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그 살짝 불편했던 찰나의 감상이 여행 이후에 오랫동안 남았기에 이에 대해 써보고 싶었다.
‘왜지? 모네의 다채로운 색을 좋아하는 내가 왜 그의 집과 정원에서 조금의 불편함을 느끼는 거지?’
그 한 톨의 불편함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었을까?
사실 질문을 떠올리는 순간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답은 아주 쉬웠다. 실제로 사람이 살았기는 했지만, 모네의 집은 단순한 집이라기에는 아주 비싼 편집샵 같기도 했고 잔뜩 힘을 준 명품 브랜드 오프라인 매장 같기도 했다. 마치 ‘고급스러움’을 과시하는 마케팅을 하려고 만든 공간처럼 보였다. 상위 클래스 0.0001%들끼리 미감을 다투며 구축한 느낌이었다. 따라서 모네의 생활 반경은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그와 평범한 사람들 사이의 경제적 격차를 상기하게 만들었다.
물론 아름다운 것에는 비싼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매우 익숙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평생을 살아왔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사포 같은 쌉싸름한 감정이 올라왔던 것은, 하필이면 조금 전에 고흐의 무덤 앞에서 묵념하고 온 탓이었다.
고흐의 무덤은 내가 유럽 여행 중 처음으로 맞닥뜨린 무덤이었다.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라는 작은 마을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을 지나면 그의 무덤이 위치한 공동묘지가 있다.
애도하는 마음으로, 동시에 죽음이란 것에 압도되지 않으려고 날이 바짝 선 마음으로 그 공동묘지에 발을 들였다.
공동묘지는 방문하기에 썩 유쾌한 공간은 아니다. 나는 죽음이 무섭다. 일상을 살아갈 때는 죽음의 존재를 무시할 수 있지만, 당연하게도 묘지에 가면 그럴 수 없다. 죽은 사람들이 실제로 이렇게나 많다는 것이 눈에 보이기 때문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공동묘지는 특히나 더 이상했다. 넓게 펼쳐진 평원의 분위기도 기묘했고 무엇보다 고흐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거짓말 같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빈센트 반 고흐, 너무 유명해서 누구나 머릿속에 '관념적 고흐' 캐릭터를 지니고 있을 지경인 그 사람의 종착지라니. 실재하는 사람이 아닌 한 명의 캐릭터로 미디어 속에서 수없이 접해왔던 고흐를 땅속에 묻혀 있는 꼴로 마주하자 기분이 정말로 울렁였다. 고흐가 이 땅을 밟으며 살아갔던 존재이지만 더 이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가 평생 끌고 다녔던 육신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밟고 다니는 지면 아래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나는 그 죽음을 외면하고 싶었으나 달리 방법이 없어 해바라기 무덤 앞에 섰다.
"'어느 커피숍에라도 내 그림을 전시할 날이 올 것이다'라고 믿었다고 하죠."
고흐는 끝까지 크게 인정받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났다. 가이드는 고흐가 생전에 어떤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설명했다. 이 시대의 가장 유명한 미술관들이 가장 원하는 화가 반열에 들어있을 고흐는 고작 커피숍에서의 전시도 간절히 꿈꿨다. 그는 고시원과 비슷한 좁은 공간에서 생활하면서도 방세를 내지 못해 허덕였다. 고물이 다 된 의자 하나를 겨우 방에 뒀고 감옥에서나 쓸 것 같은 철제 침대에 누워 잤다. 겨우 커피숍에서도 전시하면 감지덕지인 취급을 받기도 했다니. 보통 사람이라면 고흐처럼 계속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흐는 그렸다. 고흐는 돈 한 푼 못 벌면서도 돈을 벌어다주지도 못할 그림을 그렸다.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에 대한 집념이 그의 안에서 흘러넘쳤기 때문이다. 가고 있는 길이 옳은지 그른지 불안과 불신 속에 떨면서도, 생애를 다 바쳐서, 결국 빛을 보았는지 본인은 끝내 알지 못할 그림들을 그려낸 화가, 고흐. 그에게 내가 느낀 존경심 비슷한 감정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길을 몇십 년 간 걸어간 그 투지야말로 인간 승리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에서 비롯된 감동이었을 것이다. 그 감동은 본인이 가진 신념의 가치를 스스로도 끝까지 믿기 위해서 치열하게 사투했을 한 명의 인간에 대한 존중이었다.
그런 존경심을 품고, 잠들어 있는 고흐를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의 무덤에는 대리석 관 등이 없었다. 단지 해바라기 넝쿨로 뒤덮여있었다. 참 고흐 같다,라고 생각하자마자 가이드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너무 가난해서 관을 마련하고 장례를 제대로 치를 돈조차 없었단다. 그래서 그냥 구덩이에 묻히고 흙으로 봉분을 쌓은 게 원래 고흐 무덤의 전부였다고 한다. 사후에 그의 작품들이 유명해진 이후에야 사람들이 하나둘 해바라기를 가져다 두고 심어 꾸며준 것이라고 했다. 나는 고흐를 위하여 기도했다. 기도 내용은 비밀이다. 이루어져야 하니까.
원래 나는 일면 괴팍해 보이는 고흐의 그림보다는 사근 사근 오묘한 인상을 주는 모네의 그림을 더 좋아했다. 그러나 그토록 아름다운 모네의 지베르니에서, 나는 모네가 마지막 숨을 뱉었다는 침대보다도 고흐가 묻힌 차가운 흙무덤에 대해 깊이 떠올렸다. 그리고 고흐의 그림 속에서 발견했던 철학이 고흐라는 인간 안에서 어떻게 쌓여 올랐던 것인지를 떠올리며 감동했다. 고요한 보리밭을 마주 본 고흐의 무덤과 그의 작품들이 계속해서 심장 근처에서 맴돌았다.
모네의 삶과 그의 예술에 감흥이 없었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지베르니가 무척 좋았고, 모네가 목격하고 표현해 낸 세상의 아름다움에도 분명한 감동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이런 글을 쓴 이유는 고흐 그림을 그렇게까지 사랑하지는 않았던 내가 고흐에게 이렇게나 큰 존경심을 느끼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었기 때문이다.
아마 상황적인 요인이 이 감동에 작용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인생의 초입에서 중요한 시기에 서있고, 많은 진로 고민을 하고 있다. 스스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하는 커다란 질문을 정면으로 돌파해야 한다. 그런 상황이기에 불확실한 삶을 견뎌 살아낸 고흐의 삶이 준 진동이 더 크게 느껴졌다. 끝없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화가로 살아낸 그 삶이 던지는 메시지가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조언이었던 걸까. 나는 어쩌면 나를 더 믿어주고 싶은가 보다. 나를 더 믿어주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용기 있게 도전하고 싶은가 보다. 그 용기와 결단에 확신을 주는 고흐의 인생이 나에게 답이 되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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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본 고흐의 작품 중, 가장 인상 깊게 남은 그림을 하나 첨부한다.
밀을 수확하는 모습에서 죽음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죽음에는 슬픔이 없다. 모든 것은 황금빛 백주대낮 아래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