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속성
미술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보는 것이 단순히 굳어버린 물감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시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감이 걸어서 캔버스 위에 올라갔을 리 없으니까. 나는 그림을 보며 물감을 붓에 묻혀 움직이던 누군가의 손놀림을 더듬는 것이다.
우리는 그림을 통해서 100년 200년 전, 기껏 해봐야 흑백 사진으로 기억되는 그 옛날의 지구도 지금과 사실은 다를 게 없는 산과 강과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지금과 똑같은 새벽의 빛깔, 정오의 선명함, 느지막한 오후와 별 뜨는 밤의 정취를 옛사람들과 공유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캔버스 위의 모든 완벽한 것과 완벽하지 않은 것들을 본다. 섬세한 터치, 실감 나는 표정, 아름다운 색감. 그리고 틀어진 원근법과 종이를 이어 붙인 자국, 두꺼운 마티에르 위의 흠집. 회화를 회화답게 하는 그것들을 오랫동안 눈에 담고 있다 보면 이 그림이 어떤 사연으로 그려졌는지 뿐만 아니라 어떤 의도가 혹은 어떤 실수가 입혀진 것일지가 상상된다.
나는 종종 그림의 한 부분, 특히 하나의 붓터치에 집중해서 작품을 관람하기도 하는데, 특정한 붓터치를 남긴 뒤 화가가 뿌듯하다며 웃음 지었을지,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소매로 닦느라 신경조차 쓰지 못했을지, 혹은 '에잉!' 하며 마음에 들어 하지 않다가 다음날 다시 작업실로 왔을 때 '생각보다는 괜찮은데?' 하며 헛기침을 했을지를 공상해보고는 한다. 내 안에 그 화가의 인격이 중첩되는 듯한 느낌에 빠져본다. 그렇게 시간의 단면이 새겨진 미술품들과 그것에 담긴 수십 수백 년 전의 세련된 감정 표현에서 화가를 느낀다. 사람의 흔적과 그들이 남기고 떠난 인상의 존재를 깨닫는다.
최근 내가 썼던 일기를 읽다가 그림을 볼 때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 작년 이맘때쯤 나는 독일로 교환학생을 가 있었다. 근교에 여행을 갔다가 마음에 드는 수첩을 한 권 샀고, 그 수첩에 손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가끔 휴대폰 메모장에 끄적이던 것을 손으로 적어 내렸더니 차곡차곡 쌓이는 맛이 있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매일은 못 쓰더라도 이틀에 한 번, 나중에는 사흘에 한 번 꼴로는 꼭 일기를 썼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날로그 일기를 쓰는 습관은 계속되어서 어느새 한 권을 다 채우게 되었다. 몹시 뿌듯한 마음에 그동안 쌓인 일기들을 후루룩 읽었다. 그러다 문득, 일기장 속 그날의 내 시점이 현재 나의 시점과 중첩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한국의 내 방 책상에 앉아있는데 일기를 읽는 순간만큼은 마치 독일 학교의 기숙사 방에 앉아있는 내가 된 듯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아이슬란드에 갔던 나, 런던에 갔던 나, 프라하에 갔던 나가 스쳐 지나갔다. 그림을 볼 때 화가의 붓놀림이나 펜터치를 내 손 끝에서 떠올릴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상이었다. 이는 일기장 하단에 일기를 쓰던 당시의 내가 눈앞의 풍경을 끄적여 놓은 낙서를 볼 때 더 극대화되었고 나는 내 기억을 도장 찍어둔 듯 생생히 일깨워주는 이 낙서들이 참 기꺼웠다.
하루하루 살아내는 삶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두려운 나에게 그림이란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꽤 괜찮은 일기가 되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유화를 배우며 내가 원하는 장면들을 그림으로 남기고 있어서 더더욱 의미부여가 된다. 내 그림은 단순히 화폭 위에 물감만이 아니라 나의 시간을 올린 결과물인 셈이니까. 물감 안료와 기름의 조합을 넘어서,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고심한 과정과 현재의 내가 내놓은 답을 올린 것이 그림이라면, 늙은 내가 이를 보고 젊음의 초입의 나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뭔가 그려봐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이 어린 나를,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의 시선을 영원히 이 캔버스 위에 올려둘 수 있으리라고. 문득 그림에 쌓이는 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