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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 Dec 19. 2023

나의 산티아고_3

그라도에서 라에스피나까지

Day2 그라도에서 라에스피나까지

           (Grado ~ LaEspina, 30km–45,110걸음)


 국적도 성별도 나이도 다른 8명이 함께 자리 잡고 누웠고, 난 금세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눈을 뜨니 온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돌았다. 뒤척일 때마다 다리도 무겁고 어깨도 뻐근했다. 몸이 안 움직여지면 어쩌지?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10월 22일 새벽 4시 30분, 가족 단톡방은 올해 1월 취직을 하게 되어 독립한 딸의 굿모닝 인사를 시작으로 북적거렸다. 사진 몇 장을 보내고 나의 소식을 전하며 가족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산티아고로 출발할 때 딸이 건네준 편지를 꺼내어 읽어보았다.
  ‘엄마가 걱정과 두려움보다 새로움과 설렘, 기쁨과 즐거움 같이 온갖 긍정적인 기분이 매일 가득했으면 해요. 체력의 한계가 닿는 그 순간까지 즐기고 오세요.’

 목이 메었다. 엄마가 많이 가고 싶어 했던 만큼 좋은 경험과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며 사랑한다는 굵직한 아들의 메시지에는 따뜻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몸을 일으켰다. 비 소식이 있어 바깥 날씨가 궁금해진 나는 까치발을 하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성에 차지 않아 알베르게 뒷문으로 나가보니 바닥이 젖어 있었다.

 ‘비가 오는구나!’

 얼마나 내리나 가늠할 요량으로 손을 쭈욱 뻗어보니 보슬보슬 가벼운 비 몇 방울이 소리 없이 내 손등을 타고 흘렀다.

 7시가 되자 숙소마다 환하게 불이 켜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사불란한 준비를 마치고 우리는 숙소에서 준비한 아침을 먹었다. 바게트와 하몽, 치즈, 커피, 오렌지주스 그리고 사과까지 소박하지만 부족할 것 없는 한 끼였다.

 8시가 되었지만 구름이 가득 빛을 가린 하늘, 모두 준비를 마치고 하나둘 알베르게에서 빠져나갔다. 나와 제이콥도 아직 컴컴한 어둠 속을 헤치고 길을 나섰다. 언제나 시작은 함께이지만, 길 위에서 걸음이 시작되면 각자의 호흡과 보폭으로 걸었다. 길 위에서 만나는 소중한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 묵묵히 응원하면서 걷는, 그 든든한 침묵이 나는 좋았다.

 노란  까미노(CAMINO) 푯말을 보면 기분이 더 좋아졌다. 표시석에 있는 파란 바탕에 노란 조가비를 만날 때마다 칭찬의 박수 소리를 듣는 듯했다. 파이팅이라고 말해주는 조가비 덕분에 난 이제 파란색과 노란색을 제일 좋아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지평선을 가늠할 수 없는 확 트인 초록의 풍경은 생경했으나 1시간이나 계속되는 오르막길을 견딜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고속도로 다리 밑을 통과해 내리막으로 걷는 자갈길, 우리 앞에 나섰던 콰다가 갑자기 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와 스카프 하나 보지 못했는지 물었다. 못 봤다고 했더니 지나왔던 길로 무거운 배낭을 멘 채 달리기 시작했다.

 ‘중요한 사람에게 선물 받은 걸까? 나 같으면 그냥 포기하고 갈 텐데….’

 콰다는 겨우 내리막이 시작인 그 오르막길을 거의 뛰다시피 돌아가고 있었다.

 나르세르 강을 건너는 다리를 따라 왼쪽을 돌아 코르네야나(Cornellana)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1024년에 세워진 산살바도르 수도원이 있다. 지금은 알베르게를 사용하는 일부 시설을 제외하고는 버려진 상태지만, 천년의 역사를 지나왔으니 충분히 둘러볼 가치가 있다.

 제법 큰 마을이니 바르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커피 한잔과 보카디요 (바게트 안에 하몽이나 치즈를 넣은 샌드위치)를 단숨에 먹어 치웠다.

 보슬보슬 비가 내리기 시작해 우의를 꺼내 입었다. 비에 대한 대비는 이 우의 판초가 전부다. 앞으로 비가 얼마나 자주 올까? 걱정으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시 오르막길이다. 몇 걸음 앞으로 흰 백발의 짧은 커트 머리가 인상적인, 깡마른 그런데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다.

“올라, 부엔 까미노(Hola, Buen Camino! 좋은 길 되세요)”

 인사 한마디 건네고는 바쁘게 지나쳤다. 그렇게 두어 시간 걸었을까, 작은 시골 마을 길 위에서 자판기를 만났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사실 먼저 도착해 쉬고 있는 호르케 부부, 나에게 초콜릿을 한 조각 내미는 호르케의 마음이 너무나 고마웠다. 무엇이든 마시는 거라면 남들보다 두 배는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나는 레몬 소다 캔을 자판기에서 2개 뽑았다. 한 캔은 한 번에 들이켜고 한 캔을 바로 따 마시려는데, 저 멀리 아까 스친 흰 커트 머리 할머니가 걸어오고 계셨다.

 비가 오니 짊어진 배낭이 더 무겁게 느껴졌다. 힘든 내색 하기 싫어 애써 웃고 있었지만, 발길은 천근만근이었다. 구름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하더니 파란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분도 걸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길 위에 핀 노란 애기똥풀꽃이 나를 반긴다. 나일강에 놓인 데베사 나무다리를 건너 개울물이 흐르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여름에 이 길을 걸었다면 신발을 벗고 한참을 놀고 갔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들판을 지나 언덕을 넘으면 마을 살라스(Salas)다.

 중세의 아치문을 통과하고 캄파 광장으로 들어서니 오후 3시가 다 되었다. 365일 배터리 나갈 일 없는 내 배꼽시계가 어김없이 알람을 울려대고 있었다. 우선 바르를 찾아 샌드위치, 카페라테, 콜라를 주문해 눈 감추듯 삼키고 나니 여유로워졌다. 그제야 내 시선을 사로잡은 산타 마리아 라 마요르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아까 스카프를 찾아 뒤돌아 갔던 콰다는 목에 스카프를 두른 채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산 마리아 라 마요르 성당은 1445년 건설을 시작했으나, 성당이 지어지는 동안 재정난과 지진 등의 문제로 인해 공사가 지연되다가 200년이 흐른 17세기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 지어진 탓이었는지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무데히로 양식이 혼합되어 건축을 감상하는 재미가 크다. 우리는 14세기 중세 탑과 연결된 아치문으로 나와 다음 여정을 위해 걸음을 이어 나갔다.

 담장에 핀 노란 장미 봉오리가 빗물을 담은 채 수줍게 날 보고 미소 짓는다. 저 멀리 능선에서는 풍력 발전기가 힘차게 돈다. 바람이 만만치 않고 구름이 가득하니 언제 또 우의를 입게 될지 모를 일이다. 우리는 서로의 걸음을 재촉하며 목적지인 보데나야 알베르게 도착했다.

 어젯밤 로사가 예약을 해준 걸로 철석같이 믿고 걸어왔는데, 도착하니 예약이 안 되어 있다. 남은 베드는 한 개뿐이었다. 우리의 일정대로였다면 살라스에서 오늘 일정을 마무리했을 텐데, 친구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좀 더 무리해서 걸었다. 몸은 무겁고, 다리도 아프고 울고 싶었지만, 싫은 내색은 할 수 없었다. 먼저 도착한 로사도 미안하다며 다음 마을인 라에스피나알베르게 예약을 도와주었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 흰 커트 머리 할머니가 도착해 남은 베드 한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제이콥은 나의 몸 상태를 살피며 괜찮냐며 나에게 물어왔다. 대안이 없으니 서둘러야 했다. 다행히 30분 정도 걸으니 작은 마을이 보였다. 이제 쉴 수 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저녁 6시. 로사가 전화해 준 덕분에 매니저가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와 있던 프랑스 커플들은 일찍 숙소에 도착했는지 조용히 테이블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있었다. 너무 지쳐버린 나는 배낭을 풀고 샤워부터 했다.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나오니 잠도 쏟아지고 배가 고팠다. 어깨를 보니 빨갛게 부어올랐다. 골반은 욱신욱신 쑤시고 종아리도 터질 듯이 아팠다. 그중에서도 배고픔의 고통이 제일 힘들었다.

 빨래를 돌려놓고 잠시 누웠는데, 제이콥은 종일 힘들었으니 꼭 나에게 고기를 먹어야겠다며 식당을 검색했다. 이곳의 식당은 어느 곳이든 저녁 8시부터 식사 주문이 가능하다. 아직 저녁 식사 주문까지는 30분이나 남았다. 성격 급하고 잠시도 배가 고픈 걸 못 참는 나는 클라라를 단숨에 들이켰다. 또 한잔 마시고 싶었지만 고기를 맛있게 먹고 싶어 꾹 참았다. 주문한 쇠고기 스테이크 1kg가 미디엄 웰던으로 구워져 나왔고, 사이드로 주문했던 감자와 피망구이 샐러드와 함께 하우스 와인을 한잔 곁들였다. 오늘의 고생을 싹 날려버리는 맛이다. 방목한 쇠고기라 더 맛있는 걸까? 내가 배가 너무 고파서일까? 입에서 사르르 느껴지는 육즙과 고소한 소고기의 풍미로 나의 입이 바쁘다. 배부른 밤, 이제 푹 잠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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