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편안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침대에 누워서도 반짝이는 푸른빛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니 숨구멍이 제대로 트이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 작년부터 보고 싶었던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12부작 드라마를 정주행 해 볼 참이었다. 배우 한석규의 편안하고 감성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드라마는 정갈하고 맛있는 음식들과 만드는 사람의 사랑이 가득했다. 이혼을 앞둔 아내(김서형)가 암 선고를 받고 남편(한석규)에게 도움을 청한다. 남편은 아내를 위해 요리를 시작한다. 서툴지만 소중한 한 끼를 위해 가능한 좋은 식재료를 고르고, 아내를 위해 간을 거의 하지 않고, 최소한의 양념만으로 조리하는 모습이 애잔했다. 아픈 아내가 먹고 싶다는 음식을 어떻게든 제대로 만들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는 진심이 가득했다.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는 평범한 일상을 담담하게 유지하려 노력한다. 남편에게 느끼는 아내의 고마운 마음도 따뜻한 영상으로 담겼다. 냉랭하던 아들도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었다. 아빠와 함께 엄마를 극진히 돌보며 가족의 소중함을 알아갔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요리하고, 함께 먹으며 가족의 의미를 찾아가는 슬프면서도 감동적인 휴먼드라마, 나와 닮은 이 드라마는 나를 아프게도 코끝이 찡하게도 하더니 눈물을 부추겼다.
놀멍 쉬멍 오늘은
밀린 잠을 푹 자고 일어났다. 밤사이 비가 다녀간 하늘은 구름이 자욱하다. 숙소 근처 식당으로 갔다. 생일에 먹지 못했던 미역국을 주문했다. 성게알이 들어 고소하고 간이 세지 않아 담백하니 미역도 보들보들 맛이 좋았다. 미역국을 좋아하지만 날 위해 만드는 것이 어느 날부터인가 귀찮아져서 끓이지 않게 되었다. 남들은 생일날 남편이 미역국도 잘만 끓여 준다던데 이번 생에 그런 복이 내게는 없나 보다.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것으로 감사하고 만족해야 하는데 괜히 생겨나는 욕심을 무심하게 누르며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웠다.
커피 한 잔 테이크아웃 해서 숙소로 돌아와 드라마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맛있는 음식은 마음으로 만들어진다.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고 재료와 소통해야 한다.
같은 재료로 같은 과정을 거쳐도 마음 때문에 다른 음식이 된다.
사랑과 정성이 깃든 음식이라야 배부르다.
나도 언제나 마음을 다해 한 끼를 준비한다. 먹는 사람의 마음은 어떨지 몰라도 준비하는 내내 “맛있어져라.” 마법의 주문을 걸며 재료를 준비하고 밥상을 차린다. 나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아 주인공들과 함께 먹는 기분이다. 탕수육을 제대로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주인공은 시장에서 웍을 구매하고, 레시피를 잊지 않기 위해 블로그에 기록을 남긴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만드는 기쁨은 요리하는 사람만이 아는 특별함이다. 아직 외롭지 않은 우리의 밥상 행복이 오래오래 가기를, 보는 내내 기도했다.
밥보다 드라마
기분 전환하고 저녁도 해결할 겸 제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만물상 동문시장으로 향했다. 사람으로 북적대는 시장에 제주의 향기까지 넘쳤다. 딱새우, 뿔소라 줄 세운 수산 코너에 나란히 포장된 횟감들, 유채 나물, 풋마늘, 콜라비, 양배추, 고사리, 취나물 가득한 농산물 골목까지 봄바람 난 식재료들이 가득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오메기떡과 남편이 좋아하는 우도 땅콩도 한 통 집어 들었다. 코끝에 닿는 맛있는 냄새가 진동했다. 대체 뭘 먹어야 할지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저녁에 간식으로 먹을 천혜향과 양배추 가득 품고 흑돼지로 돌돌 말아진 고기 한 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맥주 한 캔을 땄다. 마지막 편이다. 나처럼 아픈 남편을 대신하며 가장을 자처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아내는 많겠지만, 아픈 아내를 위해 간병하는 남편은 얼마나 될까? 누가 만들더라도 한 끼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정성이고 사랑이고 애정이다. 그런 마음을 알아주면 감사한 일이고, 몰라주어도 도리 없는 일, 그저 준비하는 사람의 몫이다.
보면 볼수록 몰입되는 감정들로 자꾸 눈물이 흘렀다. 앞으로의 일상이 더 뭉클해질 것 같다. 나의 인생 드라마가 된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슬픈 스토리지만 음식으로 버무려져 예쁘게 만들어진 이 드라마를 많은 사람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별다른 일정 없이 밀린 잠을 자고, 드라마 한 편 여유롭게 보며 늘어진 이번 제주 여행은 나에게 온전한 쉼을 허락한 특별한 시간이었다. 남들은 “굳이 제주까지 와서?” 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