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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 Dec 23. 2024

하얀 겨울, 작은 행복

눈 내리는 날 나누는 따뜻한 온기 한 스푼

밤새 소복이 눈이 내려 온 세상이 포근한 하얀 이불을 덮은 듯했다. 동짓날 아침, 어제 미리 삶아 둔 팥을 믹서기에 물을 넣고 곱게 갈았다. 동지마다 팥죽을 보내주시던 친정엄마가 올해는 어깨 수술로 회복 중이라 팥죽을 끓이는 일은 내 몫이 되었다. 낯선 도전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내가 직접 해보고 싶었다.

동지는 한 해의 끝자락에서 새해를 준비하는 출발점이다. 그래서 ‘작은설’이라고도 불린다. 팥의 붉은빛이 부정과 악귀를 물리친다는 옛 조상들의 지혜처럼, 올해 나의 팥죽에도 좋은 기운이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엄마와 통화하며 팥죽 끓이는 법을 배웠다. 엄마의 설명은 간단했지만, 막상 시작하려니 어딘가 막막했다. 인터넷을 검색하며 여러 레시피를 살펴보다 가장 쉬워 보이는 방법으로 도전하기로 했다. 사실 팥죽은 사서 먹으면 간단하지만, 정성 들여 한 냄비 끓여서 이웃들과 나누면 더 따뜻한 추억이 될 것 같았다.

팥을 깨끗이 씻어 밥솥에 넣고 취사 버튼을 눌렀다. 팥 삶기의 첫 단계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삶아진 팥은 떫은맛이 날 수 있어 찬물에 두 번 헹궜다. 밥통 내솥도 깨끗이 닦아야 떫은맛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다. 헹군 팥에 물과 소금을 한 스푼을 더해 잡곡밥 코스로 푹 한 번 더 삶았다. 부드럽게 익은 팥을 믹서기에 넣고 동량의 물과 함께 곱게 갈아 큰 냄비에 옮겼다.

찹쌀가루를 익반죽 하는 일은 손맛이 필요한 과정이다. 뜨거운 물을 찹쌀가루에 조금씩 부으며 손으로 치대니 점점 찰기가 생겼다. 반죽이 하나로 뭉쳐지자 적당히 떼어내 손바닥 위에서 동글동글 새알심을 빚었다. 새알은 끓는 물에 넣어 하나씩 떠오르면 익은 신호다. 찬물에 헹궈 준비한 새알은 탱글탱글 윤기가 흘렀다.

팥죽 냄비에 불을 켰다. 강불에서 끓이며 찹쌀가루를 풀어 농도를 맞추었다. 중불로 줄이고, 바닥이 눌지 않도록 나무주걱으로 천천히 저었다. 설탕 두 스푼을 넣어 단맛을 더했다. 준비해 둔 새알을 넣고 저으며 팥죽의 향기를 맡았다.

 딸은 "지금도 맛있는데요!"라며 숟가락을 바쁘게 움직였고, 남편은 조금 더 달았으면 좋겠다고 해 꿀을 약간 추가해 주었다. 가족의 취향에 맞춰 완성한 팥죽은 한결 더 깊은 맛이 났다.

첫 팥죽 도전은 생각보다 성공적이었다. 한 냄비 가득 끓인 팥죽을 동네 이웃들과 나누기로 했다. 합창단 지휘자 선생님께는 마을 어르신의 따뜻한 재능기부에 대한 감사로, 도자기 공방을 하는 동행 언니는 따스한 배려에 대한 보답으로, 그리고 늘 대화의 코드가 잘 맞아 웃음이 끊이지 않는 수연이는 소소한 행복을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문 앞에 팥죽을 걸어두었다. 고맙게 잘 먹겠다는 답장이 하나둘 도착하며 마음이 더 따뜻해졌다.

팥죽을 완성한 후 엄마께 사진을 보내드렸다. “너희 나이에 팥죽 끓이는 엄마들이 얼마나 되겠니?”하시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엄마의 목소리가 전화를 타고 들려왔다. 칭찬에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졌다. 어린 시절 엄마가 끓여 주셨던 팥죽의 맛은 따라갈 수 없지만, 이번 팥죽에는 나만의 정성과 사랑이 담겼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한 해의 끝에서 가족과 이웃이 함께 나눈 팥죽 한 그릇. 그 안에는 따뜻한 온기와 감사가 가득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모든 이들이 무탈하고 행복하기를, 나도 새 마음으로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기를 조용히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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