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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바 Dec 13. 2023

꼭 후회해야지

행복을 들키면 안 돼

여행을 계획하면 누구나 준비하는 것들이 있다.
항공권을 검색하고, 숙소를 알아보고, 꼭 먹고 싶은 맛집을 검색하고, 가보고 싶은 명소를 알아본다.
그러나 나에게는 남들과는 다른 할 일이 하나 더 있다.
여행 일정 동안 엄마에게 연락이 오지 않도록 미리 준비하는 일이다.

자주 통화를 하는 사이가 아니기에 여행을 앞두고 미리 전화를 한다. 이후 며칠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아도 되도록.
여행 중에 전화를 받으면 거짓말을 하곤 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하고 있다고도 하고, 주위가 시끄러우면 마트라고도 하고.
엄마에게 나는 여유롭고, 한가하게 여행 따위나 다니는 사람이 아니어야 했다.


부모님은 이제껏 두 분만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으시다.
여름휴가조차 자식들을 앞세워 다녀야 하는..
처음 한두 번은 즐거웠다. 효도 비슷한 걸 하는 느낌.

그러나 이것이 의무가 되고 조카들과 내 아이들도 점점 자라자, 부담으로 다가왔다.
언제까지고 모든 가족이 모여 시시때때로 여행을 다닐 수 없었다. 비용 또한 부담이었다. 대부분은 첫째인 내가 총대를 메고 책임을 져야 했다. 점점 더 멀어지고만 싶었다.




얼마 전 가까운 곳으로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아이들이 더 자라기 전에 지금 나이에 오롯이 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만한 곳으로 여행 일정을 채웠다.
이번에는 무슨 용기에서인지, 엄마에게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사실대로 말했다.
용기라고 했지만, 사실 어떻게 할 고민하다 가기 전날 밤 10시에 겨우 짧은 전화를 했다.
마의 반응은 "나는 가 이해가 가질 않는다"였다.
아이들 결석까지 해가며, 당신이 병원 간다고 할 땐 쓰지도 못한다 휴가를 며칠씩이나 써가며  해외여행을 가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엄마.
애초에 엄마를 이해시키는 게 목적인 통화가 아니었으므로 '어 그렇게 됐어'를 몇 번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숙제를 끝낸 시원함은 잠시, 이내 도착한 문자가 또 감정전쟁의 서막을 알렸다.
알아볼 수도 없는 비난의 글자들..  문자를 지웠다.
여행 날 아침, 공항에서 엄마는 내내 비난의 문자를 보냈다.
본인은 아파 죽겠는데, 너는 참 독하다며  통화를 하고 나면 또 문자를 보냈다.
사실 전화를 했을 때 이렇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엄마는 내가 여유를 부리는 것 같은 모습을 보면
언제나 자신의 처지를 비난하고, 자신을 돌보지 않는 나를 비난해 댔으니까.
하지만 나도 내 가족과 어렵게 떠나는 여행이었기에 기간 동안 눈치 보며 엄마의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아 큰 결심을 했던 터였다.
고성이 오가는 통화를 하고, 몇 통의 문자를 지운 후 나는 약간은 마음 편하게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여행은 참 즐거웠다.

한국에 돌아가면 그때 욕 좀 듣지 뭐..
했던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귀국 전날, 병원에서 해주는 강의를 들으러 오겠다며 다음 주에 너희 집에 가겠다는 엄마.
아. 또 시작이구나.
어떻게 하면 내가 가장 많이 화가 날지 잘 아는 엄마는
여행을 채 마치기도 전부터 내 속을 뒤집기 시작했다.
날 하필 어렵게 잡은 약속도 있는 날인데..

문자를 보는 손이 덜덜 떨린다.
나는 또 엄마의 마수에 이렇게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되고야 만다.
공항에서 탑승을 기다리는 중에는 몇 년도 더 남은 칠순 잔치를 들먹이, 친구 자식들은 이렇게 해준다더라고 남의 사진을 보내는 엄마.
여행의 시작부터 끝까지 엄마는 참 엄마다웠다.




평소에 좀 더 아끼고, 틈을 내서 가는 여행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남들은 자식들이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준다는데,
본인은 남편 복이 없으니 자식 복도 없다며 나에게 내 험담을 하는 사람.
'칠순 여행으로 제주도라도 모시고 갈까?' 하는 찰나의  생각조차 후회하게 만드는 사람.


이렇게 또 더 멀어진다.

멀어져야 내가 숨을 쉴 수 있으니까.
그리고 또 글을 쓴다.

내 감정을 끌어다 써서 흔적조차 없애버리고 싶으니까.
나중에 후회해야지.

그냥 후회하고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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