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방에 가지 못한 지 몇 년째 인지도 모르겠다. 결혼을 하고 8년 동안 살면서 노래방에 간 것은 딱 한번. 노래방에 가지 못하는 게 큰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노래방에 가지 못한 다는 것은 인생의 큰 재미를, 기쁨을 하나 포기하고 사는 것이다.
노래야 집에서도 부를 수 있다지만 마이크가 없지 않은가. 내 노래를 들으면서 흥겨워하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이웃 간에 소음문제가 생길까 노래를 크게 부르지도 못한다. 정말이지 답답할 노릇이다.
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목욕을 하다가도, 청소기를 밀다가도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부르지 않는 인생이란 상상할 수 조차 없다. 얼마나 불러댔으면 유치원에 다니는 둘째가 10년, 20년도 더 된 노래를 따라 부른다. 첫째는 내가 학창 시절 좋아했던 아이돌 가수들의 뮤직비디오를 보며 춤을 춘다. 역시 음악도 조기교육이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을까?
거꾸로 거꾸로 인생을 되짚어가다 보니 역시 그 시작에는 부모님이 있었다. 나에게는 나보다 21살 많은 아빠와 22살 많은 엄마가 있다. 일찍이 결혼을 하셔 나를 낳으셨기에 내가 유치원에 입학할 무렵에도 부모님은 20대 중반이셨다.
음악을 좋아하는 젊은 엄마아빠 밑에서 자랐기에 노래방에 따라다니며 자연스레 대중가요를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가 유치원 캠프에서 장기자랑 시간에 '남행열차'를 불렀다는 엄마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신기하다.
어릴 적 사진을 보면 TV를 보면서 학용품 풀을 마이크 삼아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이 있는데, 노래는 그냥 나의 일상이었던 것 같다.
본격적인 노래인생의 시작, 합창단
1998년, 초등학교 입학과 함께 젝스키스, god, 신화, 핑클, SES 등 아이돌 가수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왔고 나의 노래인생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번 빠지면 아주 끝장을 보는 성격 때문에 대중가수들의 노래를 속속들이 다 알고 시도 때도 없이 부르고 다녔는데, 그 덕분에 친구들 사이에서 노래 잘하는 애라고 불리며 노래 부르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스스로도 노래를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했기에 음악시간에도 적극적이었고, 10살 무렵 친구가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 따라갔다가 덩달아 피아노를 시작하게 되었다.
악기를 배우면서 음악에 대한 이해와 애정은 더욱 깊어졌고,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서는 음악선생님의 눈에 띄어 학교 합창단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노래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웠는지, 아직도 음악선생님의 얼굴과 이름, 목소리, 표정, 하시던 말씀까지 생생하게 기억난다. 단복을 맞춰 입고 합창대회에도 나갔는데, 난생처음으로 무대에 서서 노래하던 그날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초등학교시절 음악과 함께하며 행복했던 기억은 자연스레 중학교까지 이어졌다. 중학생시절에도 합창단에 들어가 활동했으며 교내 합창대회를 할 무렵이면 앞에 나서서 반 친구들을 이끌었다. 3학년 때는 교내 합창대회에서 우리 반이 1등을 했는데 그때 합창의 묘미를 제대로 느꼈다.
처음 연습을 시작할 때는 불협화음이 너무나 심해서 참 막막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한마음 한뜻으로 시간만 나면 책상을 뒤로 밀고 연습을 했다. 엉킨 실타래를 풀듯 조금씩 화음을 맞추었고, 마음을 맞추었다.
대회가 끝나고 난 뒤 노력하면,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것을, 함께하면 더 강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통해 리더가 되어 팀을 이끌어본 경험은 나의 자존감을 높여 주었으며 학교생활을 즐겁게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수험 생활 중에도 계속된 음악생활
쉬는 시간, 체육시간, 등하굣길 가릴 것 없이, 남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않고 노래를 부르던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된다. 바로 중창단이다. 학교 동아리 중에 중창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달음에 음악실로 달려가서 오디션을 보았고, 중창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 하교 후, 시간만 나면 음악실에 삼삼오오 모여 노래를 불렀다. 그냥 모여 노래만 부른 것이 아니라 대회를 목표로 연습을 했기에 꽤 체계적으로 연습을 했다.
호흡부터 발성까지 기본기를 충실하게 연습했고 소프라노, 메조, 알토 파트별로 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음을 맞추고 또 맞추었다. 그리고 중창단에 들어 간지 반년이 지나 우리 기수의 리더를 선출하였는데 단원들이 나에게 리더의 자리를 주었다.
그렇게 나는 학익여자고등학교의 중창단 ‘학날애’ 12기의 리더가 되었다. 중학교 때도 친구들 앞에 나서서 노래를 가르쳐주고 이끌어 주었지만 중창단의 리더가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선배들과 동기들 후배들까지 챙겨야 하는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1년 동안 준비기간을 거쳐 2학년이 되면 현역으로 활동하며 각종 대회에 참가할 수 있기에 주말이면 플래카드를 만들고, 간식을 싸들고 선배들의 중창대회를 따라다니며 응원을 했다.
대회는 대게 큰 교회들에서 열렸는데, 대회를 하는 날이면 인천 각지에 있는 학생들이 모여 갈고닦은 실력들을 뽐내었다. 샤론, 메바세르, 아가페, 코이노니아, 에코 등등 각 중창단의 이름과 뜻을 외우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남학생들의 무대를 감상할 때는 늘 신기했다. 장난꾸러기들이 무대에 올라가면 엄청 진지해지기 때문이다. 변성기를 거친 지 몇 년도 되지 않았으면서 제법 낮고 굵은 목소리로 공간을 꽉 채우는 것이 여학생들의 무대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교회에서 진행되는 대회이기에 찬송가를 중창으로 부르는데, 교회에 다니고 있지 않음에도 함께 눈을 바라보고 손을 마주 잡고 노래를 부르는 선배들을 보면 꼭 주님의 은혜를 받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프로는 아니지만 학생들만이 낼 수 있는 순수한 소리는 경건한 공간과 만나 황홀함을 선사했다.
대회가 끝나면 각 학교의 중창단원들이 모두 교회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각자 동그랗게 원을 만들고 목소리 높여 다 함께 노래를 하는데, 또 그 모습이 장관이다. 서로 다른 노래들이 섞여 만드는 웅장한 소리는 대회가 끝나고 며칠 동안 머릿속에 맴돌정도로 대단했다.
선배들을 따라다니면서 내가 무대에 선 모습을 상상하며 가슴 설렜던 날들이 지나고 드디어 나에게도 무대에 설 수 있는 현역의 시간이 찾아왔다.
음악인생의 최대의 고비, 성대결절
중창대회는 3월 말쯤부터 시작되어 1년 동안 인천 각지의 교회에서 열린다. 그리고 12월이 되면 장소를 대여해 중창단마다 각자 정기 발표회를 연다.
1년간의 긴 여정이기에 많은 시간을 중창단 활동에 쏟아야 했다. 보통 대회가 가까워오면 야간자율학습도 빼고 연습에 매진하는데, 현역시절의 첫 대회를 앞두고 나에게 생각지도 못한 고난이 닥쳐왔다.
목이 아픔에도 따뜻한 물을 계속 마셔가며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그 탓이었을까 목 상태는 점점 안 좋아져 고음을 소화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고 나는 좌절하고 또 좌절했다. 목에 혹이 생겨서 아프고 소리가 갈라지는 것이었다. 진단명은 성대 결절이었다.
나의 목 상태는 갑자기 안 좋아진 게 아니었다. 여자도 변성기를 거치는데 남자보다 티가 나지 않을 뿐이지 변화는 분명히 온다. 중학교시절 합창단 생활을 할 때 목이 안 좋았었는데 그때가 변성기였던 것 같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시도 때도 없이 노래를 부르고 다녔던 것이다.
목을 아끼지 않는 습관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계속 이어져 상황이 악화되었다. 성대결절이 생겨 음악생활을 오래도록 하지 못하는 가수들을 여럿 보았기에 나의 걱정과 한숨은 깊어져만 갔다. 리더로서 맡은 바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하게 되어 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최대한 말을 하지 않고 노래를 하지 않으며 목을 아꼈지만 결국 나는 첫 무대에 서지 못하였다. 나의 목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고, 다시는 이전처럼 노래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울게 만들었다.
중창은 인원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한 사람만 빠져도 타격이 크다. 하지만 무리를 하다가는 원래의 목소리를 영영 잃을 수도 있었기에 수많은 대회를 그냥 넘겨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연습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여 마음을 함께 하는 것과, 무대에 선 팀원들을 바라보며 박수를 쳐주고 응원의 눈빛을 보내주는 것뿐이었다.
안타깝게도 현역시절 중창대회 무대에는 서지는 못했지만 조금이나마 목상태가 호전되어 연말 정기 발표회는 함께 할 수 있었다. 발표회가 끝나고 팀원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유일하게 무대에 설 수 있는 현역시절인데, 무대를 눈앞에 두고도 올라갈 수 없었던 상황이 너무 속상했고, 리더로서 도움이 되지는 못하고 걱정거리가 되어버린 나의 존재가 너무 한심해서 괴로웠던 그 마음들이 다 쏟아져 나왔다.
성대결절을 진단받고 심적으로 많이 힘들어서 중창단을 탈퇴해야 하나 고민도 했었지만 끝까지 함께 하는 것에 의의를 두었고 중창단 활동을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음악적인 성장과 성과도 중요하지만 고되고 힘든 고등학교 3년 동안 함께 노래하며 마음을, 추억을 나눈 인연들을 얻었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리고 2016년 2월, 졸업 후 다시는 뭉치지 못할 것 같았던 중창단 친구들이 한데 모였다. 내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축가를 불러주려 달려온 것이다. 비록 그날도 함께 하지 못하고 친구들의 노래를 들어야만 했지만 참 행복했다.
각자 바쁜 일상을 보내는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연습을 해준 고마운 친구들, 축가 준비를 하며 학창 시절이 떠올라 즐거웠다는 친구들.
또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다 함께 손잡고 눈을 마주 보며 노래할 그날이 오길 바란다.
지금은 나름 화려했던 음악생활을 뒤로한 채 아이들과 동요를 부르는 엄마가 되었지만, 아직 젊기에 ‘언젠가는 무대에서 다시 노래할 기회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기대해 본다.
늘 음악과 함께하며 감성 충만하게 학창 시절을 보낸 것에, 인생의 힘든 시기마다 노래를 부르며 잘 버틸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오늘도 노래를 부른다. 들어주는 이 하나 없어도 즐겁게 기쁘게 노래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