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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은 벗 Apr 08. 2023

지금을 진지하게 살아가는 태도

시간의 파동-입자 이중성

1.

사람은 시간의 영향을 필히 받는다. 자연스레 시간과 관련한 개념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사회에 만연한 시간의 개념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문명과 떨어져 있는 세계의 몇몇 부족에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없다는 것을 미루어 보았을 때, 시간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의 단위는 또 어떤가. 고대 사람들은 하루의 길이를 지구의 자전 시간에 맞추었고, 현대의 과학자들은 1초를 세슘 원자가 일정 수만큼 진동할 때 걸리는 시간으로 정의했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은 인간이 창조한 듯싶다. 그리고 자주 쓰는 시간의 표현인 시제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과거는 있었던 일들, 미래는 앞으로 다가올 일들의 집합이라고 한다면, 현재는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사람들은 현재에 대한 막연한 이미지만 가지고 있지, 말로 설명하기 힘들어하지 않을까. 국어사전은 "현재"를 "지금의 시간"으로 정의한다. "지금"은 "말하는 바로 이때"라고 정의를 내린다. 굉장히 추상적이고 애매하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친구를 잘 모르는 것 같다.



2.

빛은 파동과 입자의 성질 둘 다 지닌다. 과학자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그들은 파동처럼 움직이는 빛에 입자의 잣대를 가져다 대고, 입자처럼 행동하는 빛을 파동의 잣대로 평가했을 때 처참히 실패했다. 파동이자 입자의 상태로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를 불편하게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개념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간이 인간이 만들어낸 추상이고 빛이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빛과 닮았다. 시간에게도 파동-입자 이중성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인생에게 시간은, 파동처럼 연속적으로 퍼지는 하나의 흐름이자, 동시에 입자처럼 개별적인 순간의 연속이다. 과학자들은 빛이 입자와 같이 행동하는 것을 발견하기 이전에 빛은 당연히 파동일 것이라 생각했다. 파동성을 증명하기 위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밝혀진 에테르라는 매질을 가설화하기까지 했다. 이와 비슷하게,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흐른다"라고 하면 당연하게도 파동과 같이 연속적으로 움직이는 생각을 머릿속에 그린다. 지나간 과거는 현재를 만들었고, 현재는 다가올 미래를 빚을 것이다는 무의식적인 생각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빛의 입자성을 통해 광전 효과를 증명하고 빛이 입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듯이,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시간을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짧은 순간의 연속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 & 고가 후미타케). 구체적으로,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고, 현재가 미래에 영향을 주리라는 확신 또한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의 실로 이어져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압력을 가한다면, 우리가 변화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실을 끊는다면―순간과 순간, 오늘과 어제(또는 내일), 그리고 현재와 과거(또는 미래)를 분리한다면―이 부담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다.


시간의 파동성과 입자성은 모순되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빛의 파동성과 입자성이 서로 다른 실험과 이론들을 설명하고 증명했듯이, 시간의 두 성질 또한 쓰임새가 다르다고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기 위에 일관된 스토리가 필요하다면, 시간의 파동성에 의존하면 된다. 그러나 현재에 집중하고 싶다면―과거와 미래에 대해 신경 끄고, 현재라는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고 싶다면―시간의 입자성에 기대는 건 어떨까.



3.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목표를 가지고 살아간다. 이렇게 보면 인생은 정상이라는 목표를 향해 열심히 등산하는 행위로 보인다. 시간의 파동성에 의존하면 인생이 하나의 스토리로 보이고, 그 끝에는 정상에 오른 나 자신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되는 부분은, 우리는 정상이 아닌 길 위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는 것이다. 꼭대기에만 가치를 둔다면, 오르는 과정을 무시하는 처사다. 산을 오르다 보면 우리는 다른 길로 새기도 하고, 잠깐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아예 정상을 찍지 않고 하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런 인생들은 가치가 없는 것인가?


앞서 언급한 『미움받을 용기』는 인생의 목적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주장을 펼친다. 다만,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목적이고 결과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해 보자. 여행 중에는 항상 새로운 것 위주로 마주치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에 온전히 집중한다. 집에서 나와 다시 돌아오는 모든 순간이 여행의 목적이며 결과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는 일어났던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매일 새로운 일을 수용한다. 시간을 선이 아닌 점들의 연속으로 정의한다면, 인생의 목적지는 저 멀리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산을 오르는 과정 자체가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 순간을 진지하게 살았다면, 지금 생을 마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시간의 입자성에 의하면, 모든 순간은 완결된 삶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왜 이렇게 목적지에 집착하고 미래를 걱정하는 것일까? 미래를 걱정하던 우리의 조상들이 그렇지 않은, 현재에 집중했던 조상들보다 생존율에 있어 진화론적인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그리고 미래를 걱정하는 이 조상들이 과거, 현재, 미래라는 개념을 만들어 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존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기에 현재에 집중하기 더 좋은 환경이 만들어졌다. 미래를 걱정하던 조상들도 현재를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걱정했을 터인데, 언제부턴가 그 의도가 희미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


아무튼, 결국 파동과 입자의 적절한 조화가 필요할 듯싶다.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면, 미래를 계획하고 그것에 맞게 시간을 파동처럼 보내는 것이 좋아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인 것처럼 현재를 미래를 위해 쏟아붓고 있다면, 그것은 시간의 입자적인 성질을 무시하고 현재를 누리지 못하는 태도인 듯하다. 마찬가지로, 과거에서 배울 것이 있다면, 과거 속으로 들어가 고민하고 성찰하는 것은 전혀 나쁠 것이 없다. 그러나 과거의 시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시간의 두 성질은 공존해야 한다.



4.

현재에 충실한 삶은 물리학적으로는 빛에 속도에 근접하는 운동이다 (『말의 사람 글의 사람』, 이재영). 빛에 속도에 가까워질수록 상대성 이론에 의해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고, 시간 자체가 흐르지 않는 단계에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빛은 늙지 않는다. 그렇기에 빛이 지각이 있다면 시간의 개념조차 모를 것이다. 『몰입의 즐거움』의 작가 칙센트미하이는 사람이 현재에 몰입하면 시간 감각이 사라진다고 주장하고, 이야말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궁극의 즐거움이라고 주장한다. 현재를 진지하게 살아가면 시간의 존재를 잊게 된다.



5.

시간은 파동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입자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빛의 이중성을 불편하지만 받아들인 과학자들처럼, 우리도 시간의 이중성을 용인해야 한다. 우리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살아간다. 시간의 파동성과 입자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평소 시간의 존재를 잊을 정도로 삶에 몰입하는 것이, 현재를 진지하게 살아가는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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