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 거울
스무 살 초반, 나의 단짝 친구에게 첫 남자친구가 생겼다. 여중여고를 거쳐온 우리에게 ‘남자친구’라는 존재를 그야말로 새롭고, 신비하고, 설렘 그 자체였다. 단짝이었던 만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서 내심 질투도 나고 친구의 남자 친구가 야속했지만, 그래도 ‘그래~ 우리도 이제 꽃바람 찾아야지~’하는 마음으로 친구의 연애를 응원해 줬었다.
친구의 첫 연애는 꿈에 부풀었었고, 핑크빛으로 가득했었다.
“어머, 이러다 결혼까지 하는 거 아냐? 까르르~! “
하는 설레발까지 쳐가며, 우리는 거의 상상 속 드레스투어도 갔었다. 아마 결혼식 식순까지도 짰던 것 같다.
하지만 연애가 어디 평탄하기만 하던가.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의 남자친구와 있었던 재밌는 이야기는 줄어들었다. 그 대신 싸웠던 이야기, 남자친구에 대한 불만이 그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덧붙이자면, 불만을 넘어서 남자친구의 처지를 비난하곤 했었다.
나도 연애를 해봤다면 친구의 이야기가 공감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모태솔로는커녕 썸도 타보지 않았던 입장에서 친구의 이야기에 공감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종종 친구가 연애의 불만을 토로할 때마다, 남자친구를 비난하는 말을 내뱉을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었다.
“연인을 대하는 방식이 결국 나를 대하는 방식이구나."
친구에게 가장 큰 아킬레스건은 가족들과의 관계, 그리고 학벌이었다.
친구의 부모님은 어려운 시절에 자수성가하여 두 분 모두 서울권 대학을 졸업하시고 대기업 임원과 전문직을 가지셨다고 한다.
하지만 친구는 수능에서 미끄러져 경기도권 대학을 진학할 수밖에 없었고 친구보다 공부를 조금 더 잘했던 쌍둥이 동생과 서슴없이 비교하셨다. 친구는 부모님께 결코 자랑일 수 없었다. 인정은커녕 따뜻한 말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사랑해 줄 수 있겠는가.
그래서일까? 친구는 남자친구와 점점 가까워지고 편해지면서, 자기 자신을 대하는 방법대로 남자친구를 대했다. '나는 사랑받지 않고 있어.'라는 마음 때문에 "네가 아무리 날 사랑한다고 해봤자"라는 말이 나왔었다고 한다. 자신의 학벌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에 대학을 나오지 않은 남자친구도 부끄럽게 느껴졌었더란다.
상처받은 자아를 미처 돌보지 못한 상태에서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야 말았던 것이다.
(※경기도권 대학, 비진학하신 분들을 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인식의 격차 정도로 받아들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때 당시 나는 친구의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사랑한다면서? 왜 저렇게 상처 주는 말만 하지?’라는 의문만 가득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후, 나도 연애를 시작하면서 이제야 친구의 입장을 이해하게 됐다.
'나는 사랑받기엔 한참 부족해'라는 낮은 자존감은 연애 과정에서 "나에게 실망했을 게 분명해. 그러니 내 진면모를 보이기 전에 더 상처를 주고 손 떼겠어!"라는 생각도 했으니 말이다. 정말 어리숙했다.
‘수박은 속을 봐야 알고, 사람은 지내봐야 안다'라는 속담이 있다. 정말 그렇다.
사람은 시간이 흘러 점점 가까워지고 편해졌을 때 진짜 모습이 나온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행동이 무의식적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대방을 볼 때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적용해야 할 말이다. 나는 과연 지낼수록 좋은 사람일까?
나를 소중하게 여겨본 적이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나를 한 번도 이해해보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그랜드 캐니언을 가보지 않은 사람이 그랜드 캐니언에 대해서 가이드를 해주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보지 않고 타인을 사랑한다는 말은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거짓말과 같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모님으로부터 온전히 사랑받고 자란 경우가 드물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딘가 결핍된 사랑, 왜곡된 사랑을 받고 자랐다면 영원히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이 세상에 사랑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무엇이 진정한 사랑인지, 어떤 것이 참된 사랑인지는 우리 모두 알 수 없다. 다만 나에게 맞는 사랑을 찾아갈 뿐이다.
나는 연애하는 나의 모습을 많이, 자주 관찰해 보았다. 나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소하는지 보았다. 남자친구와 차이점도 발견하면 가끔 재미있기도 했는데, 특히 화가 났을 때 내가 이 감정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좀 더 집중했다. 사람의 사이는 좋을 때는 괜찮지만 감정이 나빠졌을 때 틀어지기 쉽기 때문이었다.
몇 달의 관찰을 해보자, 나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견디는 법을 잘 모르는구나.' 그렇다. 부정적인 감정이 들면 마치 우리의 관계가 끝났음을 암시하는 듯한 생각이 밀려들어왔다. 또한 "이런 감정을 들게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내면의 속삭임도 있었다. 부정적인 감정을 다루는 법을 모르다 보니, '이런 건 나쁜 거! 피해야 해!'라는 신호 감지만 했던 것이다. 그리곤 상대를 향해 일방적인 맹공격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이런 나의 모습을 마주한 덕분에 해결점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왜 이런 상황이 기분이 나빴을까?'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하면 나름의 대답이 나왔다.
'그게 나한테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지?' 이번엔 조금 더 깊이, 그 상황이 나에게 의미하는 바를 찾았다.
'오빠는 그걸 알고, 나를 일부러 기분 나쁘게 하려고 그랬던 걸까?' 사실 아니라는 걸 안다. 상대방은 어떤 특정한 상황이 트리거가 될 거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내가 받아들이는 것과 상대가 받아들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기 마련이니.
'그럼 다음에도 이 상황을 마주했을 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때부터는 실질적으로 해결 방법을 찾아갔다.
나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이라면, 나에게 맡겼다. 만약 혼자 해결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남자친구에게 솔직하게 전달했다."나는 이런 상황이 불편하게 받아들여지더라고. 물론, 오빠가 일부러 그랬다는 게 아닌 거 알아. 내가 얘기하지 않았는데 오빠가 어떻게 내 마음을 알겠어. 그게 더 이상한 거지. 그래서 다음에는 이런 상황일 때는··· ···."하고 함께 해결방법을 만들어가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연애를 통해 나의 다양한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나의 모난 모습을 발견했을 때 회피하지 않고 마주한 뒤, 개선할 방법을 찾아가자 나는 나를 더욱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발전하고 있고, 부족하지만 노력으로 극복해 낼 수 있다'는 믿음은 나를 존중하게 만들어줬다. 나아가 상대를 향해서도 긍정적인 믿음과 존중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가끔 감정을 쏟아낼 때가 있다. 완벽하게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할 때가 있지만, 그땐 신랑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다시 풀어간다. 자책은 하지 않는다. 나는 아직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이니까. 다만 다음번엔 더 잘 해결해 보리라고 마음먹을 뿐이다.
연애도 결혼도 마냥 좋은 일만 있을 순 없는 것 같다. 사람 사는 일이라 그런가. 하지만 어떤 갈등과 문제에 직면했을 때, 이를 회피하기보다 오히려 나를 발전시켜 갈 도구로 활용해 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이런 과정은 내가 계속 만나도 될 사람과 만나면 안 될 사람을 구분 지을 수 있는 나름의 기준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내가 진심을 다해 노력하고, 함께 맞춰가는 길을 찾자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비아냥 거리거나 피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함께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땐 나와 함께 노력할 사람을 찾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