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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백돌이다

이른 시간, 지하철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다.

by 무어

어느새 익숙해진 출근길, 비 내리는 장마철의 눅눅함까지 더해진 아침.

그 와중에 갑자기 지나가는 승객의 어깨에서 가방이 떨어져 내 맥북을 툭—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고 화가 치밀었다.


0.5초.

짧은 숨 한 번이 화를 눌렀다. 찰나의 이성이 감정을 잡아당겼다.

그 순간부터 시작됐다.


오른쪽에 앉아서 팔을 반복적으로 흔드는 중년 남성.

틱장애인가 싶을 정도의, 자꾸 내 팔을 건드리는 미세한 접촉에 신경은 실처럼 팽팽해졌다.

왼쪽에는 190cm는 족히 넘어 보이는 거구의 남성이 서 있고,

정면엔 가방을 두 개나 멘 남자가 서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의 크로스백이 내 맥북 화면에 닿을 듯 말 듯, 지금 내 집중력은 그 끈에 매달려 위태롭기 그지없다.


그리고 냄새.

비에 젖은 옷에서 풍기는 곰팡이 냄새,

어제 회식의 흔적처럼 남은 고기 냄새, 술 냄새,

담배와 칙칙한 남자 스킨 향이 섞여 퍼져온다.

내 코는 항복을 외치고, 머리는 점점 무거워진다.

문득, 내 모습이 떠올랐다.


바둑판 한가운데 놓인 백돌.

사방팔방에서 흑돌들이 나를 조여 온다.

숨 쉴 틈조차 없다. 아군은 없다.

곧 누군가 나를 집어 바깥으로 던져버릴 것만 같다.

하지만 나는 버티고 있다.


이 작고 희고 둥근돌 하나가,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서, 나를 지키고 있다.

세상은 조여 오고, 공간은 쉽게 주어지지 않지만—

아무도 모르게, 묵묵히.


나는 오늘, 백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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