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출 것도 없고 내어놓아도 허물이 안 되는 모임이 있다.이름에 '자'자가 들어가 있는 일명 ‘자자’ 모임이다. 잠자는 것처럼 편안한 모임을 하자는 의미에서 만든 이름이다.
자자 모임이 시작된 계기는 이러했다. 고향을 떠나지 않고 농사짓는 도식의 불알친구 조민기와 송영한의 부부가 모여보니 아내의 이름에 ‘자’ 자가 있는 것이었다. 조민기의 아내는 양귀자이고 송영한의 아내는 김자영이다. 역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이름들이구나 하고 그냥저냥 동질감을 느꼈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농사에 입문했을 무렵엔 부모님이 지어오던 포도 농사를 그대로 지었다. 포도 농사만으로는 젊은이들이 아이 키우며 살아가는 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나름 선구자인 사람들이 큰 토마토 농사를 짓다가 방울토마토 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방울토마토 농사는 큰 수익을 안겨 준다는 소문이 있었다.
수익이 높은 만큼 밑천이 많이 들고 손도 많이 가고 일이 까다롭다고 했다. 그러나 부모님 세대와 다른 생활을 꿈꾸는 젊은 농부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식과 그의 불알친구인 조민기와 송영한이 방울토마토 농사를 시작했다. 예상대로였다. 특히나 여자의 일이 더 많았다. 남녀 따져서 일하는 것은 아니지만 농촌 남정네들의 관습상 큰 덩어리만 하고 잔일이라고 치부되는 일거리는 여자에게 떠넘기는 경향이 있었다. 40cm 간격으로 빼곡히 심기는 방울토마토 농사는 자연스레 사람을 사서 하게 되거나 품앗이를 하게 되었다. 봉자도 도식의 친구 아내들과 품앗이를 했다.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일, 하고 돌아서면 또다시 제자리인 듯한 방울토마토 농사에 지쳐갔다. 어느 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푸념을 늘어놓았고 푸념의 결론은 콧바람을 쐬는 것이었다.
셋 다 좋아하는 피자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하루일을 마치고 시부모와 남편 아이들 저녁밥 차려 주고 편안하게 밤에 만났다. 피곤한 줄도 모르고 피자를 먹고 쇼핑을 하고 노래방에서 남은 힘을 다 빼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엔 더 빨리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밤늦게까지 놀다 왔다는 소리 안 들으려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놀았던 짜릿한 기분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겼다. 그 여운은 토마토밭 아낙들을 자꾸만 들쑤셨다. ‘토마토 하우스에서 일하다가 죽어도 아무도 모를 거야. 평생 젊을 것도 아니고 놀고 보는 거야’라고. 봉자와 귀자, 자영은 곧바로 모임을 결성했다.
“우리가 아이들 두고 하루 저녁 노는 것은 가족을 위한 것이여”
“스트레스 풀고 오면 가족에 대한 서비스가 달라질걸”
“그래 맞아. 남자들 술 마시는 시간에 비하면 새 발의 피도 안 되지 암만”
그녀들이 한 달에 한 번 저녁을 자유롭고 화려하게 보내야만 하는 이유는 명확해졌다.
봉자와 그녀들은 그날로부터 남편들을 젖혀두고 불알친구보다 더 깊은 우정을 쌓았다.
한 달에 한 번 아무 날에 만나기로 했다. 아무 날은 가족의 대소사가 없는 날이며 세 명이 같이 만날 수 있는 날이다.
모임을 만들어 놓고 보니 여간 좋은 것이 아니었다.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라는 물음에 망설임 없이 피자라고 답하는 셋은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갓 구워낸 피자와 샐러드를 맘껏 먹었다. 또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였으니 피자 외의 맛집을 찾아 아닐 수도 있었다. 따라다니며 아직도 멀었냐며 보채는 남편의 눈치 안 보며 자유롭게 쇼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런 ‘자자’ 모임이 세 명에게 만족감을 주었다는 말이 남편들 사이에 퍼졌다.
그 무렵 도식의 불알친구인 정호섭이 창원에서 하던 개인 트럭 일을 접고 귀농했다. 호섭은 1남 1녀를 두고 이혼을 했고 재혼한 아내 사이에서 얻은 딸 하나와 다섯 식구이다. 호섭의 아내도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름이 ‘서필자’였다. 처음 해보는 농촌 생활, 일과 시골사람에게 받는 스트레스는 ‘자자’ 모임에 관심을 가지게 했고 무엇보다도 운명적인 이름으로 모임에 합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힘든 일 하더라도 행복하게 살라고 이름 지어주신 부모님의 예지력에 감탄할 따름이었다.
넷은 ‘자자’ 모임을 충실하게 이끌어 왔다. 해를 더할수록 ‘자자’ 모임의 남편들도 월 행사로 인정해 이 모임이 잘 유지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모임이 십 년을 지나 십오 년째 접어들 무렵 도식의 불알친구인 정정팔의 아내 조은자가 시댁으로 들어왔다. 정팔은 구미에서 직장을 다니다가 아내보다 10년 먼저 귀농했었다. 은자는 1녀, 1남이 대학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귀농한 것이다. 은자는 명절이나 포도 수확 철에 꾸준히 만나 왔었기에 ‘자자’ 모임의 신입회원으로 손색이 없었다. 이렇게 다섯은 더 깊은 우정을 쌓아갔다. 어느새 ‘자자’ 모임은 20년이 되었다.
봉자, 귀자. 자영, 필자, 은자는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다르지만 일단 만나면 그들 사이엔 모르는 것이란 없었다.
파스타가 대세인 요즘은 그녀들도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한 가닥은 빼어놓고 한입에 쏙 들어갈 만큼 파스타를 말았고 모아 두었던 이야기는 풀어놓았다.
그녀들은 마치 국가 대표 스피드스케이트선수 같았다. 쇼트트랙을 계주 하듯이 바통을 받아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돌아가면서 말을 늘어놓아도 연결이 다 되었고 이해하지 못할 말은 없었다. 인신공격 말고는 못 할 말도 없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녀들의 주제는 시월드, 남편, 아이들의 이야기였다. 두 시간 반 동안 도마 위에서 난자해진 사연들을 말미에는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녀들은 가족이 좋아하는 음식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 달간의 활력소를 충전하고 또 하나의 평생 직장인 집으로 돌아갔다. 가족이 무엇이길래, 그들 때문에 힘들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그들이 생각나고 그들을 위해서 스스로 마음을 비우고.....